지난달 세상에 숱한 일화를 남겼던 김영삼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떴다는 소식이 들리자마자 그동안 그를 치열하게 비판했던 수많은 언론들이 일제히 ‘김비어천가’로 돌아섰다.

 

그가 현직에 있을 때 다른 사람 같으면 어림도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전제로 깔고 하나회척결, 공직자 재산등록, 금융실명제 실시와 같은 굵직굵직한 업적을 찬양하는 말로 도배를 했다.

 

임기 마지막에 IMF사태를 유발한 책임을 들어 우리 경제를 망친 사람으로 매도하던 분위기는 싹 가셨다. 원래 죽은 사람에 대해서는 욕을 하지 않는 것을 예의로 삼는다고 하지만 아무튼 그는 죽은 다음 크게 명예를 회복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 역시 ‘김영삼 전 대통령과 민추협의 탄생’이라는 제하의 글을 통하여 민주화투쟁에서 남긴 정치적 조직과정을 내가 아는 사실만으로 기록하기도 했다. 그의 서거는 이미 오래 전부터 예고되어 왔었다. 평소에 “머리는 남에게 빌릴 수 있어도 건강은 빌릴 수 없다”는 지론을 가지고 조깅과 등산 그리고 배드민턴으로 몸을 단련해 왔으며 미국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에도 청와대 경내를 함께 뛸 정도였다.

 

그는 한 시대를 동지로, 경쟁자로, 정적으로 살았던 이철승, 김대중, 김종필보다 나이도 아래였지만 건강 면에서는 추종을 불허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김대중은 먼저 갔지만 이철승과 김종필은 아직 건재하다. 다만 그들도 예전과는 달리 지팡이에 의지하거나 휠체어 신세를 면치 못한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큰 인물들도 나이가 높아지면서 어쩔 수 없이 찾아온 병마에 여기저기가 쑤시고 아픈 것은 당연한 일이다. 평소에 건강관리에 유난히 열중했던 사람도 하루아침에 쓰러지기도 하고 겉보기에는 천하장사 같은데 기실 허약한 이들도 얼마든지 많다.

 

나 자신부터 비록 젊은 시절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으며 전신이 망가졌지만, 교도소에 갇혀 있을 때에는 요가와 단전호흡으로 심신을 바로 잡았고 밖에서는 등산을 통하여 누구 못지않은 건강을 자신하기도 했다. 그러나 요즘 주위를 살펴보면서 허리 다리 머리를 새삼스럽게 주무르며 자신을 추스르고 있는 편이다.

 

그런데 YS의 서거이후 갑자기 내 주변에 있던 분들이 저 세상을 찾아가는 불행이 잇따르고 있어 어리둥절하다. 맨 처음 소식은 어려서부터 친하게 지낸 학교동창 신건의 죽음이다. 그는 국가정보원장을 거쳐 국회의원까지 역임했지만 언제나 친구들과 허물없이 어울리는 좋은 친구였다. 무척 추운 날씨였지만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영결식장에 많은 조객이 그의 운구를 지켜본 것은 평소에 덕망을 소홀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그 다음 미국에 사는 동창 육완영이 이역만리에서 조국 하늘을 바라보며 숨을 거뒀다는 슬픈 부음을 들었다. 딸 셋을 두었지만 그 중의 하나가 장애를 가지고 있어 이민을 결심했던 사람이다. 미국은 장애인 천국이라고 간간히 귀국할 때마다 말했는데 이제는 만날 길이 없다. 사회운동에 열심이었던 박종민선생은 이범석이 만든 민족청년단 1기 출신으로 올해로 96세다. 지난달에도 매월 한 번씩 만나는 청산회 정기모임을 가졌는데 그 날이 마지막이 되었다. 100세를 축원했는데 허무하게 떠나셨다.

 

국회의장을 두 번이나 역임한 이만섭선생은 후배들에게 맛있는 점심을 사주겠다고 하면서 주로 서대문에 있었던 코리아하우스를 애용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이 집은 미군을 주 고객으로 한 스테이크 전문이었는데 큼지막한 고기를 칼질하시던 모습이 생생하다.

 

기자 출신답게 날카롭고 풍자에 능했던 분이었다. 4.19혁명 당시 홍익대학교에 다니면서 자유와 정의를 바로 세우자고 외쳤던 장진호동지 역시 근자에 몸이 좋지 않다는 풍문이 들리더니 엊그제 장례를 치러야 했다. 수유리 4.19묘지에서 거행된 영결식에는 이기택회장을 비롯한 혁명의 동지들이 모두 나와 마지막 가는 길을 눈물로 적셨다.

 

이처럼 불행한 일이 겹치는 것을 옛 사람들은 화불단행(禍不單行)이라고 했다던가. 그런데 이번에는 외우(畏友) 최동전이 광화문 자기사무실에서 여러 후배들과 만나기로 해놓고 약속을 어겼다. 감기기운이 심해서 순천향병원 응급실에 입원했단다. 급성 폐염으로 진단이 나왔다고 하니까 곧 떨치고 일어날 것으로 확신하고 있지만 며칠 전에도 특유의 유머를 구사하며 유쾌하던 친구가 갑자기 중환자실 신세를 지고 있다고 하니 남의 일 같지 않다.

 

최동전은 반독재투쟁으로 유난히 여러 차례 감옥살이를 한 사람이다. 긴급조치9호 위반으로 영등포교도소에서 마치 관(棺) 같이 생긴 징벌방에서 내 바로 옆방에 있었다. 그는 불면증이 있어 자정이 넘어도 잠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저나 잠을 못자면 됐지 옆방에서 곤히 잠든 나까지 쿵쿵 벽을 발로 차서 깨우는 사람이었다.

 

나 역시 자다가말고 벽을 차서 아직 안자는 것처럼 화답을 했던 것이 벌써 39년 전 일이다. 재작년 이철우동지가 세상을 하직했을 때 이부영 유광언 김도현 장호권 이경용 안재창 등 동지들이 모여 민주투사 이철우선생 장례위원회를 꾸미고 최동전을 장례위원장으로 뽑았는데 영결식장에서 대성통곡하는 통에 장례시간을 늦춰야 했다.

 

고령으로 접어드는 가까운 사람들이 몸에 고장을 일으켜 거동이 불편해지는 것은 참말 어쩔 수 없는 일일까. 나이 탓이라고 하지만 새 해에는 재주 잘 넘는 원숭이해라고 하니 모두 나뭇가지를 부여잡고 이 나무 저 나무로 활개를 치며 달리는 원숭이처럼 건강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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