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연말 칼럼에 “아프다고 꼭 죽는 것 아니다”라고 썼는데 이게 헛말이 될 줄이야. 외우 최동전이 갑자기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중환자실에 면회를 갔다가 의식도 없이 누워있는 친구를 보면서 하염없이 우러나오는 슬픔을 누르며 ‘그래도 살아날 것’을 확신하면서 글을 썼지만 결국 그는 37일 만에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났다.

 

그렇다고 아픈 사람이 모두 죽는 것은 아닐 것이기에 그 글은 희망의 글이다. 빈소에 모인 친구들은 평소 고인이 큰소리치던 모습을 대부분 기억하고 있었다. 세계보건기구에서 인간의 최대수명은 123세라는 연구발표를 발표했을 때 최동전은 농담반 진담반으로 “나는 124세까지 산다.”고 말했던 것을 되새겨낸 것이다.

 

비록 상가였지만 조문객들은 이 말을 화제 삼아 먼저 떠난 사람을 추억했다. 추억의 실마리는 현대사 기록연구원장 송철원이 풀었다. 그는 민주화운동기념 사업회에서 최동전의 생전 인터뷰 영상기록을 인출하여 빈소에 설치된 TV화면에 24시간 방영했다. 고인이 서울대 재학 중 4.19혁명을 겪고 6.3굴욕외교 반대운동을 주도했던 저간의 실마리가 생생한 육성으로 재현된 것이다.

 

그는 바로 붙잡혀 대문짝만하게 신문을 장식했던 김중태 현승일 김도현 송철원과 달리 날쌔게 잠적하여 오랫동안 도망자 생활을 했다. 이 때 그는 신화적 인물로 인구에 회자되었으나 유명인사로 등장하지 않은 몇 사람 안 되는 인사 중 하나가 되었다.

 

나중에 붙들려 감옥에 들어갔지만 이미 주요인물에선 제외된 뒤였다. 그러나 그는 철저한 조직인으로서 교도소 안에서도 수많은 교도관들과 인간적인 유대를 가졌다. 그가 교도소를 들락거린 것은 6.3운동 이후 긴급조치9호까지 박정희정권이 단말마의 독재를 강화했던 때다. 이 무렵 그의 교도관들과의 우정은 수많은 동료 수감자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

 

이번에 그가 긴급입원한 날에도 푸른한국 사무실에서 당시의 교도관 친구들과 저녁약속을 해놓고 막상 자기만 못나오는 인연을 유지하고 있었다. 빈소에 모인 그들의 면면은 형님처럼 따랐던 고인의 크고 넓은 가슴을 되새기며 울먹였다. 그들은 재직 당시부터 민주인사들을 돕다가 되레 감방에 갇히거나 퇴직 후에 붙들려 들어가 호된 고문을 받은 이들도 여럿이다.

 

전병용 최양호 김성열 김재술 김형옥 한재동 나종남 김영배 최영옥 등이다. 그 외에도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많은 민주교도관들이 문익환 이호철 이영희 등 선배수감자들에게 마음을 써줬음은 최동전 같은 사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고인은 경주출신으로 서울대 철학과를 나왔기에 전주출신으로 전북대를 나온 나와는 학생시절에는 아무 인연도 없었다. 나이는 동갑이지만 학번으로는 2년 밑이다. 60년대 말 전국 4.19 6.3운동 운동자들이 주도하는 민주청년협의회가 결성되었을 때 내가 사무장을 맡아 실무를 주관할 때 최동전과 만나 깊은 우정을 나누며 긴급조치9호 시절에는 1년 이상 함께 징역살이를 했다.

 

감옥에서도 그는 남다르게 주눅이 들지 않는 사람의 하나였다. 중앙정보부에서 호된 고문을 받고 독방살이를 했지만 원래 있었던 불면증 말고는 특별히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것 같았고 특유의 독설과 유머감각은 그대로였다.

 

중환자실에 입원하고 있을 때 박종열 정수일 박범진 오태성 이현배 이원재 최혜성 김덕용등 몇 사람이 모였다. 의사는 회생이 어렵다는 진료의견을 전했을 때다. 이 때 나는 사전준비 의견을 냈다. “고인의 일생은 처음부터 끝까지 민주화를 위한 투쟁이었다. 동광출판사를 창립하여 성공적인 사업운영을 했던 것도, 사단법인 푸른한국을 만들어 바른정치, 부패추방 운동을 벌인 것도 모두 그의 민주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였다.

 

민주화를 향한 그의 집념은 그가 세상을 뜨더라도 계속될 것이다. 남은 우리들은 그의 뜻을 살려 그의 장례는 민주사회장으로 해야 한다”. 모두 동의했다. 이를 집행하기 위한 책임자로 나를 지목했다. 1월 28일 새벽 그는 떠났다. 예식은 형식에 불과하지만 관례를 벗어나면 후일에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을 수 있다.

 

장례위원장은 끝까지 사양하는 이재오에게 간곡히 부탁하고 부위원장에 정수일 이경용, 집행위원장 전대열 그리고 1백여 명의 장의위원을 위촉했다. 그러나 막상 장의위원 인선에 빠진 분들이 장례식장에서 섭섭한 마음을 가질 것은 분명한 일이기에 거듭 사과의 말씀을 드려야 했다.

 

영결식은 1월29일 밤에 치렀다. 30일 발인이지만 새벽에 벽제승화장으로 모시기 때문에 앞당겼다. 1백여 명이 참석한 영결식은 ‘민주투사 최동전선생 민주사회장’으로 공식명명하고 모두 숙연히 식장에 도열했다. 맨 앞자리는 휠체어에 몸을 기댄 최형우 전 내무부장관이 앉았지만 그 역시 말 한마디 할 처지가 아니다. 평소 목소리가 큰 이재오 장례위원장도 낮춘다.

 

선배 이영호교수는 고인이 다른 후배와 달리 인간적인 측면이 너무 강한 사람이어서 존경한다는 추모사를 했고 박종열교수는 여러 가지 삽화를 담았다. 이부영과 김도현은 대학시절의 얘기를 잔잔하게 피력했다. 이경선시인과 이경용부위원장은 추모시를 낭송하여 가는 이의 마지막 명복을 빌었다.

 

그의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배영이도 의젓했다. 이제 최동전은 떠났다. 음치가 아니었다면 ‘백세인생’을 크게 불러 “아직 할 일이 많아서 못 간다고 전해라”고 했을 텐데---. 경주에서 올라온 여동생 최위옥은 ‘오빠들 덕분에 편안히 눈감았을 것’이라고 했지만 너무나 아쉽고 안타까운 민주사회장을 치렀다.

 

전 대 열 大記者. 전북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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