땡전 한푼 없는 한겨울, 시베리아 횡단에 도전

◈ <중앙뉴스> 로재성 논설위원의 시베리아 횡단기 제 1부   

 

 

▲ 시베리아 횡단 열차가 출발역 플랫홈에 정차한 모습     © 로재성 논설위원

 

◈ 겨울 시베리아를 횡단하다. [제1부]

 

◈ 땡전 한푼 없는 한겨울, 시베리아 횡단에 도전

 

 

내가 한겨울에 시베리아 동토를 횡단하고자 마음먹은 것은 작년 12월 하순 우리나라에서 날씨가 가장 따뜻한 제주도에서였다. 글을 쓰다 돈이 떨어져 제주도에 사는 한 시인형님에게 SOS를 보냈고 형님은 무조건 내려오라고 했다. 마침 그와 친분이 두터운 박 선생이 관리하는 빈 방이 있다는 소리에 짐을 싸들고 제주도로 내려갔다.

 

토목전문가인 박 선생은 해외건설현장에서 오래 일한 선이 굵은 60대 후반의 남성이었는데, 내게 1월초에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타자고 했다. 제주시내 한 초라한 술집에서 우리는 의기투합했다. 그는 이미 러시아 왕복항공권과 시베리아 횡단 기차표를 사두었다.

 

나는 주머니에 땡전 한푼 없었다. 박 선생도 제주도 공공기관에서 계약직 근로자로 일하고 있었으나 내 여비를 댈 만큼 사정이 넉넉지 않았다.

 

나는 그의 주선으로 아파트 공사현장의 잡역부로 들어가 여비를 마련하기로 했다. 건설현장에서 먼지를 뒤집어쓰며 6일 동안 하루 9만원씩 벌었다. 나는 박 선생이 짠 시베리아 횡단 스케줄에 수정을 가했다. 16박 17일의 대장정이었지만 여로 중간에 바이칼 호수가 빠져 있었다.

 

그가 탈 기차는 바이칼 호수에 들르지 않고 시베리아를 8박 9일간 횡단할 예정이었다. 시베리아의 눈동자라 불리는 바이칼 호수를 보지 않는 시베리아 횡단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나는 박 선생이 기차표를 산 여행사에 전화를 걸어 바이칼 호수가 있는 이르쿠츠크에서 2박을 하도록 일정을 수정했다. 기차 칸도 6인실이 없어 4인실로 상향시켰다. 박 선생은 여비가 모자란다고 투덜거렸다. 그도 공공기관과 계약이 끝나 나랑 잡역부로 같이 일했다.

 

그렇게 우리는 100만원의 여비를 모았으나 건설회사는 노님을 한 달후 지급하는 관행이 있음을 몰랐다. 박선생은 이리저리  손을 뻗어 겨우 비행기값(왕복 62만원),기차값(50만원)을 지불하고 현금 55만원을 마련했다.

 

16박 17일간 시베리아 9,288km를 횡단하면서 먹고 자는 경비를 두 사람이 단돈 55만원으로 해결해야 했다. 무슨 비상사태가 생길지도 몰랐다. 달러나 카드도 쓸 수 없는 곳이 태반이라고 했다. 그래도 우리는 뻔뻔할 만큼 자신만만했다. 출발일은 2016년 1월 3일이었다.

 

떠나기 사흘 전 사고가 터졌다. 노동판에 뛰어든 박 선생이 과로로 독감에 걸려 병실에서 링겔을 꼽고 누워 있었다. 나는 여행을 미루자고 했고 박 선생은 자신은 1월 말에 다시 계약직으로 복직해야 하니 여행연장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이어 말했다. “당신 나이도 나보다 훨씬 젊은데, 혼자 시베리아 횡단하면서 좋은 글을 써봐. 이런 기회가 아니면 언제 가? 이번 여행으로 인생의 전기를 마련하라고...”

 

그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여행을 포기하면서 나의 여행을 종용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가겠다고 선언했다.

 

러시아 왕복항공권과 시베리아 횡단 기차표, 그리고 박 선생이 내게 물려준 현금 55만원이 전부였다. 나는 하루 3만원의 돈으로 시베리아 1만 km를 관통하고 3개의 도시에서 8박을 해야 했다. 나는 영어실력도 형편없었다.

 

박 선생은 오랜 해외경험으로 영어가 유창했다. 나는 공직에 재직할 때 형편없는 영어로 구라파를 돌아다녔다. 10개국이 넘는 해외여행을 단체관광으로 오리처럼 따라다닌 적이 없었다.

 

그래, 영어가 안 통하는 러시아지만 한 번 새로운 경험을 해보자. 나는 트렁크에 모든 옷을 쑤셔넣고 밑반찬으로 서울서 사온 멸치 한 봉지와 꼴뚜기 반 봉지까지 집어넣고 1월 3일 아침 제주공항에서 김포공항으로 왔고 오후 1시 15분에 러시아 아에로플로트 비행기를 타고 모스크바로 향했다.

 

내가 시베리아를 횡단하게 된 것은 박 선생의 계획 때문이었고 당초 여행의 조역이었던 나는 주역이 되어 그가 사둔 비행기표와 기차표, 그가 마련해준 여비 55만원을 가지고 러시아로 들어갔다. 땡전 한푼 없는 빈털터리 작가가 무모하기 짝이 없는, 굶거나 얼어 죽기 딱 좋은 상태로 한겨울 시베리아 횡단에 도전했다. 나는  살아 돌아오게 해달라고 천지신명께 기도했다.

 

나는 괴상한 코트 하나를 가지고 있었다. 문화관광부 산하 한국문화예술진흥원에 18년간 다녔다. 죄만 짓지 않으면 60세가 되도록 잘리지 않고 근무하는 철밥통 직장에서 젊은 부장으로 잘 살다가 40초반에 글을 쓰기 위해 사표를 내고 식구들과 제주도로 내려갔다. 그때 옆집에 사는 안성총각 스킨스쿠버 강사에게서 스쿠바를 배워 제주바다와 필리핀 바다에서 잠수를 해봤다.

 

국제 잠수자격증도 땄다. 이때 잠수복 재료로 만든 시커먼 외투를 주문 제작했는데, 보온성과 방수성이 최고였다. 등에는 스쿠버프로(SCUBAPRO)라는 흰 글자가 선명했다. 나는 잠수복 외투로 중무장하고 모스크바에 밤에 도착했다. 이 잠수복 외투 하나로 시베리아 기차 안에서 많은 승객들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1월 3일 9시간을 날아가 모스크바 공항에 도착했다. 서울보다 6시간이 늦은 모스크바에는 어둠이 일찍 내려와 있었다. 우선은 숙소를 찾아가는게 급선무였다. 도심으로 들어가는 기차를 탔다. 커다란 트렁크를 끌며 기차역을 빠져나왔다.

 

박 선생이 예약한 게스트 하우스는 전화번호도 없었고 주소뿐이었다. 도심 기차역에서 숙소가 멀지 않다고 했으나 방향조차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거리는 너무 춥고 나는 스마트폰의 구글앱으로 주소를 찾아가는 재주도 없었다. 스마트폰을 전화기능으로 만 알고 살아온 것이 후회막급했다.

 

별 수 없이 택시를 탔다. 기사는 영어 한 마디 몰랐고 주소만 보고 택시를 몰았다. 택시는 나를 어느 어두컴컴한 도로 곁에 내려주었고 기사는 주소를 갖고 집을 찾아보겠다고 했다. 10분간 추운 거리를 헤메던 기사는 포기하고 차를 몰아 달아나버렸다.

 

나는 트렁크와 함께 캄캄한 모스크바 주택가 한 귀퉁이에 섰다. 주소를 물어볼 행인도 없었다. 나는 주소를 가지고 아파트 형태의 오래된 낡은 고층건물들을 돌아다녔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온몸이 꽁꽁 얼었다. 나는 숙소를 포기하고 다른 호텔을 찾기로 하고 택시를 잡으려고 했으나 차도 안 지나갔다.

 

그때 젊은 처녀 한 명이 지나갔다. 나는 다가가 말을 걸고 주소를 내밀었다. 앳된 러시아 처녀는 내게 말했다. “혹시 한국인 아니세요?”나는 깜짝 놀랐다. 칠흑같은 러시아 밤거리에서 한국어를 하는 사람을 만난 것은 기적이다. “네, 맞아요. 이 주소를 찾고싶어요. 근데, 한국어를 잘 하시네요?”.“저는 모스크바대학 한국어과 학생이에요.”이런 행운이 찾아오다니. 학생은 구글지도로 검색하더니 주소를 금방 찾아냈다.

 

골목길를 한참 헤매던 끝에 학생은 나를 허름한 주택으로 안내했다. 숙소 벨을 누르자 두터운 철문이 열리고 젊은 여인이 나를 맞았다. 나는 한국어과 학생과 헤어지며 거듭 감사를 표시했다. 어두침침한 8인실 1층침대에 짐을 내려놓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드디어 러시아의 첫날밤을 무사히 보내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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