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정가에 어느 때부터인지 멘토라는 낮선 단어가 떠돌기 시작했다. 멘토는 상담자이면서 충고자이기도 하다. 상대방으로부터 깊은 신뢰를 받으며 현안에 대한 견해를 주입시켜 행동에 옮기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해서 영향력이 대단하다.

 

우리 정치판에서도 이런 인물이 지도자 주변에 널려 있었지만 그들 대부분은 가신이라는 이름으로 심부름을 하거나 뒷전에 숨어서 일했다. 김대중 밑에 엄모라고 하는 참모가 한사람 있었는데 그는 표면에 나서는 일 없이 김대중의 초기 등장을 돕는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뒤 풍문은 여러 가지 설이 떠돌고 있으나 겉으로 나타나지 않았던 사람이라 긴 얘기가 필요 없다. 멘토로 표면에 등장한 사람은 아마도 윤여준과 김종인 정도 아닐까. 윤여준은 충청도 출신으로 김영삼 밑에서 장관까지 역임하며 정치계의 이름난 거물들과 많은 교유를 가졌다. 그러나 그의 멘토가 큰 성공을 거뒀다는 후문은 별로 들려오지 않았다.

 

오히려 실패의 풍문만 떠돌 뿐이다. 안철수와 붙었다가 떨어지기를 거듭하는 것만 봐도 상당한 성가를 지닌 것은 분명한데 기대한 것 보다는 실물로 보여주는 것이 없어 의아할 따름이다. 반면에 김종인은 당대의 지사였던 가인 김병로 전 대법원장의 손자라는 화려한 배경을 가지고 등장했다.

 

그가 전무후무할 것으로 보이는 비례대표 국회의원만 4선이나 기록한 것만 봐도 예사롭지 않은 솜씨다. 김종인 역시 멘토로서의 기량을 충분히 발휘하여 박근혜 대선에서 경제민주화의 기치로 한 몫 단단히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대체적으로 여당권에서 맴돌며 실리를 차지해온 경력을 가지고 있는데 박근혜로 부터는 발탁의 기회를 놓치고 180도 뒤집어 이번에는 야당의 멘토를 맡았다. 아니 대장이 되었다. 문재인의 끈질긴 당대표 사수(死守)노력이 한계를 보이자 돌연 김종인을 영입하고 물러섰다. 문재인이 조금만 일찍 당을 수습했다면 지금 같은 분당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시간을 오래 끌었기 때문에 당은 지리멸렬했고 안철수가 탈당을 결행하는 사태로 번졌다. 친노의 극성에 못 견딘 사람들이 줄줄이 따라 나갔다. 문재인이 지난번 대선 때 가장 많은 표를 받은 곳이 호남인데 이번에는 호남민심이 홱 돌아섰다. 안철수의 인기가 전통적인 야당으로 지칭되는 더민주당의 두 배를 넘는 폭풍을 일으키며 하늘로 치솟았다. 여기에 찬물을 끼얹은 것이 한상진의 이승만 국부발언이다.

 

중도 진보적 색채로 ‘낡은 진보’를 타파하겠다는 초심이 지나쳐 극우세력에 영합하는 발언이 나오게 된 배경은 알 수 없지만 4.19혁명의 대도를 잊어버린 국부발언은 전 국민의 여망을 하루아침에 뒤집어 버렸다. 결국 사과로 수습하긴 했지만 한번 내려간 인기는 좀체 살아날 기미가 안 보인다.

 

그나마 기대했던 20명 국회의원으로 구성되는 원내교섭단체 구성이 19명에 머물고 있어 단 한 명의 의원입당이 절실한 처지가 되었다. 어차피 야당이나 여당에서 공천 탈락한 사람이 몇 사람 추가입당으로 목매어 기다리는 교섭단체는 성공할 것으로 보이지만 더민주의 자칭 대장이 된 김종인의 현란한 정치농락에 안철수는 전전긍긍하고 있는 것이 문제다.

 

김종인은 과거 국보위에 참여했다고 해서 전두환 앞잡이라는 말까지 듣던 초창기와 달리 이제는 당내의 불만세력을 일거에 잠재우고 공천권을 한 손에 거머쥐는 ‘대장’으로 변모했다. 자기 말마따나 그는 천성적으로 대장체질을 타고난 모양새다. 그는 문희상과 유인태를 포함한 중진의원들까지 공천에서 배제하더니 느닷없이 국민의당을 향하여 야권통합을 제안하고 나섰다.

 

이 한 마디가 국민의당에게는 쓰나미였다. 안철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더민주 탈당의원들은 문재인과 코드가 맞지 않았을 뿐 제일야당의 울타리에 안주하고 싶어 한다. 더구나 당대당 통합이 된다고 하면 현역의원의 공천이 전제되어야 한다.

 

기득권을 가진 국민의당 의원들은 통합야당의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한 득표력을 확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다. 김종인의 제안에 대해서 안철수는 비열한 정치공작이라고 격렬한 반대의사를 표시했고 의원총회에서도 ‘통합은 없다’고 결론 냈다. 그러나 이 달콤한 제의에 김한길과 천정배 등이 몸살을 앓으며 안철수와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어 가뜩이나 인기가 떨어진 국민의당을 위축시키고 있다.

 

김종인은 느긋하게 ‘통합제의는 아직도 유효하다’고 꽃놀이패를 즐긴다. 그렇다면 이 통합제의는 과연 진정성이 있는가. 안철수는 혼자서 ‘광야에서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고 의지를 불태우지만 김한길 등의 이탈행동이 맘에 걸린다. 과거에도 이런 사례들이 많았다. 그러나 야권이 통합에 성공한 일은 흔하지 않다. 첨예하게 이해가 다르기 때문이다.

 

더구나 눈앞에 총선이 다가왔다. 죽기 살기로 싸워도 이길지 말지 모를 판에 한가하게 통합논의에 매달려 있을 시간도 없다. 오직 김종인만이 이 싸움의 승자다. 통합이 된다면 단박에 큰 지도자로 승격할 것이고 안 되더라도 국민의당을 충분히 분열시켰으니 그가 노린 성과는 거두고도 남는다. 그의 세치 혓바닥에 놀아나는 국민의당 지도부가 한심할 뿐이다.

 

안 될 것을 뻔히 알면서도 행여나 홍시가 내 입속으로 떨어지기를 바라는 요행수를 추구하는 정치인이라면 이미 자격상실이다. 정정당당한 정책을 내건 신념의 정치를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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