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일생에서 가장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다

 

 ◈ <중앙뉴스> 로재성 논설위원의 시베리아 횡단기 제 3 부 

 

 

▲ 기차에서 바라본 풍경     © 로재성 논설위원 

 

◈ 겨울 시베리아를 횡단하다. [제3부]

◈ 내 일생에서 가장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내가 오래 전에 타고 다녔던 경춘선 무궁화호 열차와 비슷하다. 열차를 연결하는 통로에 찬바람이 몰아치는 것을 보면 옛날 통일호를 생각나게 한다. 기차는 선로를 욱신거리며 좌우로 흔들거렸고 묵직한 엔진음은 저음의 바리톤이었다. 마치 내가 30년 전의 젊은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다.

 

바깥은 영하 수십 도의 맹추위가 몰아치나 열차 실내는 영상 21도를 유지했다. 나는 너무 더워 옷을 벗고 반팔 셔츠와 얇은 운동복 하의로 갈아입고 슬리퍼를 신었다.

 

눈 덮인 시베리아 벌판의 철로변에서 머나먼 지평선까지 자작나무 바다가 나타났다. 숲속의 귀인이라는 하얀 자작나무는 잔가지마다 눈을 가득히 달고 화려한 자태로 허공에서 무희처럼 춤을 추고 있었다. 태양은 중천을 차지한 채 강렬한 햇살을 온 벌판에 뿜어댔고 금빛 햇살을 받은 벌판은 순백색으로 반짝거린다. 자작나무는 더욱 하얗게 빛났고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웠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고 흰 물감을 섞어 백청색이다. 기차는 힘차게 나아가며 자작나무 숲을 뒤로 밀어내고 있다.

 

시베리아 횡단은 보통 블라디보스톡에서 승차해 모스크바를 향한다. 나는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톡을 향해 나아간다. 나는 태양이 뜨는 쪽을 향해 나아가고 있고 시간대를 조금씩 앞당기고 있다. 모스크바에서 한국까지는 6시간의 격차가 있으나 앞으로 점점 줄어들 것이다. 이번 여로를 통해 태양을 따라가며 동진하면서 좌절로 이어진 지난 십여년 세월을 털어내고 더욱 강해지고 싶고 새로운 희망을 잉태하고 싶다.

 

더욱 단단하게 일어서고 바람 부는 시베리아 숲속에서 중동이 부러진 나무처럼 꺾이지 않고 싶다. 철도변 자작나무 숲에 중동이 부러진 자직나무들이 널려 있다. 자작나무가 부러지면 하얀 나무기둥만 남는데, 수백 개의 나무기둥들은 전쟁 때 참수당한 적군의 시신처럼 보인다. 열차는 세 시간 넘게 자작나무 바다를 항해하고 있다.

 

제13호 열차의 여승무원 라라는 얼굴만 예쁜 것이 아니라 무척 부지런하다. 매점을 관리하다가도 화장실을 승객이 사용한 즉시 들어가 물청소를 하고 수시로 복도청소를 하는데, 억척스럽고 책임감이 강한 러시아 여인이다. 열차가 이름 모를 작은 역에 잠시 정차할 때 화장실 문을 열었더니 라라가 러시아어로 소리치며 나를 제지했다.

 

영문을 몰랐으나 나중에야 알았다. 열차의 화장실 배설물이 기차의 선로에 직접 떨어지는데, 정차한 역의 철로에 배설물을 떨구지 못하게 했다. 역에서 한참 빠져나와야 화장실 사용이 가능한데, 70년대 통일호 열차가 생각나 오히려 정겨웠다.

 

유일한 샤워시설인 화장실의 수도꼭지에서는 따뜻한 물이 졸졸 흘러나온다. 컵에 받아 손바닥으로 고양이 세수를 했는데, 기분은 날아갈 듯하다. 열차칸마다 작은 매점이 있는데, 간단한 잡화를 판다. 열차에서도 러시아를 휩쓴 한국의 도시락 라면이 인기인데, 개당 1천원이다. 생수 500ml짜리가 800원이다.

 

시베리아 횡단열차에는 안내방송이 없다. 가는 내내 러시아어도 영어도 한 마디 나오지 않는다. 승객들은 열차 복도 벽에 달랑 한 장 붙은 작은 표지판을 열심히 들여다본다. 기차가 8박 9일 동안 달리며 정차할 수백 개 역의 이름과 시간표다. 기차는 작은 역이라도 1분도 틀리지 않고 도착하고 떠난다. 작은 역은 1분간 쉬고 좀더 큰 역에서는 10분, 대도시 역에서는 30분이나 1시간 정차한다.

 

정차시간을 알면 나가서 사진이라도 찍으련만 겁이 나서 내릴 수가 없다. 나중에야 알았다. 그 작은 정차 시간표가 러시아어만 써 있는 게 아니라 영어로 표기된 역의 이름이 있다는 것을. 나는 재빨리 수첩에 주요 역의 영어이름과 도착시간을 옮겨적었다.

 

1월 8일 새벽 3시 반. 횡단 열차의 차창 밖은 암흑이다. 2층 침대에서 러시아 청년 둘은 코를 골며 잠들어 있고 차창 옆 작은 전구에서 흘러나오는 노란 불빛 속에서 글을 쓰며 생각에 잠긴다. 복도 벽에 매단 스마트폰 충전기는 50%를 가리킨다.

 

오전 7시 55분. 해뜨기 직전의 시베리아 벌판은 음침하다. 어둑어둑한 숲과 지평선에서 붉어지는 하늘이 나타난다.  기차가 지나가는 자작나무 숲은 거무튀튀하고 음침한 풍경화 속을 달리는 듯하다.

 

오전 8시 16분. 동남쪽 지평선이 붉게 물들어간다. 그 앞의 거대한 숲은 거무죽죽하다. 하늘의 구름은 수많은 산과 구릉지대처럼 보이고 시베리아 벌판은 산 하나 보이지 않는다.

 

오전 8시 19분. 들판이 더 밝아졌다. 자작나무 숲은 제 모습을 드러냈고 지평선은 점점 더 붉어진다.  흰 눈을 뒤집어 쓴 채 서 있는 자작나무들은 키 크고 날씬한 러시아 미인처럼 아름답고 우아하다.

 

8시 23분. 태양은 숲에 가려 보이지 않으나 동남쪽 하늘은 온통 새빨갛다. 엷은 구름은 노을처럼 물들었고 마치 석양을 보는 듯하다. 구름층에 덮인 동남쪽 하늘 가장자리가 붉게 타오르고 중천까지 시뻘겋다. 온 지상의 만물이 태양을 향해 경배를 드린다.

 

9시 5분. 지평선 숲 위로 떠오른 태양은 강렬한 빛을 시베리아 온 벌판에 퍼부어댄다. 오늘 하늘은 어제보다 더 맑고 투명하다. 벌판의 낡은 농가주택들의 지붕에는 눈이 하얗게 쌓였고 눈이 쌓이는 걸 막기 위해 지붕의 각이 날카롭다. 벽돌이나 나무로 만든 집들의 굴뚝에서 하얀 연기가 뭉글뭉글 허공으로 솟구친다.

 

이름 모를 기차역에서 잠시 정차했다가 떠나는 기차. 기차역 옆에는 오래 전에 세워졌으나 지금은 쓰지 않는 급수탑이 서 있는데, 붉은 벽돌로 원통형으로 만든 15m정도의 탑은 러시아 정교회 지붕이나 크렘린 궁의 망루를 떠올리게 한다. 내 고향 연천 기차역의 급수탑은 콘크리트로 만들어졌고 담쟁이덩굴로 덮인 그 탑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9시 43분. 시베리아 들판은 화사한 햇볕으로 가득하다.  흰 눈을 쓴 자작나무는 바람결에 나뭇가지를 흔들고 전나무 숲은 금빛으로 달아오른다. 드넓은 경작지를 덮은 눈밭은 순백색으로 반짝였고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기나긴 화물열차와 횡단열차 사이에서 바람이 회오리치며 굉음을 질러댄다.

 

이틀간 달려도 산 하나 보이지 않고 터널 하나 없는 거대한 들판을 기차는 힘차게 동녘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려가고 있다. 내가 상상해온 것보다 시베리아 벌판은 더 컸고 웅장했고 때 묻지 않은 순결한 자연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황혼으로 향하는 내 인생에 시베리아가 들어와 가슴을 적시고 있었다.

 

이런 비경을 보다니 행운아가 아닌가. 거대한 차창에서 시베리아의 파노라마가 상영되고 있고 내 가슴은 삶의 기쁨으로 충만하다. 내 스마트폰에서 신세계 교향곡이 흘러나왔다. 나는 내 일생에서 가장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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