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좀 따뜻해지는가 싶더니 어느덧 화려하던 벚꽃이 모두 땅바닥에 뒹군다. 화무십일홍이니 자연의 섭리지만 이를 망각하고 사는 계층이 정치인들이다. 그렇게 알아듣도록 열심히 가르쳐줘도 권불십년을 애써 잊어버리고 사는 사람들이다.

 

권력을 쥐고 있을 때 무소불위로 칼을 휘두르다가 언제인지 모르게 그 칼날에 자신의 목이 달아난다는 것을 어떻게 해야 깨달을 수 있을까. 어제까지만 해도 서슬 퍼렇게 큰소리치던 자들이 갑자기 맨 땅바닥에 무릎을 꿇다니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일까.

 

새누리당은 공천을 둘러싼 더러운 싸움으로 일관하다가 다급해지니까 무릎을 꿇었다. 더민주당 역시 비례대표 앞자리냐 뒷자리냐를 놓고 한판 싸움을 벌이더니 결국 무릎을 꿇었다.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남한산성에서 항전하던 인조가 청 태종 앞에 무릎을 꿇고 삼배고두(三拜叩頭)하던 삼전도(三田渡)의 치욕이나 마찬가지 행동이다. 국민 앞에 큰 죄를 지었으니 용서해달라는 간청이다. 이번 선거에서 무릎 꿇은 양당의 꼬락서니는 똑같이 천박하게 보였지만 끝내 용서를 받지 못한 것은 새누리당이다.

 

그들은 안방이었던 영남에서도 외면을 받고 제2당으로 전락하는 수모를 당했다. 반면 더민주는 이미 녹색바람이 분 호남에서는 기지 탈환에 실패했지만 수도권에서는 예상을 뛰어넘는 대약진으로 제1당으로 부상하는 저력을 발휘했다. 함께 무릎을 꿇었지만 그 진정성을 판단하는 국민의 시각에 더 부합했던 모양이다.

 

20대 총선의 결과는 한마디로 민심의 혁명이다. 제헌국회 이후 스무 차례의 국회의원 총선을 치르면서도 여당이 제2당으로 추락했던 적은 한 번도 없다. 전체의석수에서 새누리가 122석, 더민주가 123석으로 1석의 차이 밖에 안 나지만, 지역구 당선자로만 치면 105석대 110석으로 5석차이다.

 

정당투표에서 약간 앞서는 새누리가 그나마 비례대표에서 4석을 더 얻어 전체적으로 1석이 모자라는 구도가 된 것이다. 여기에 곁들여 국민의당의 약진이 돋보이는 것은 지역구 25석에 비례대표를 무려 13석이나 차지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정당투표에서는 제1당인 더민주보다 더 많은 표를 받아 똑같이 13석씩 나눠가질 수 있게 되었다.

 

한 때 180석을 바라봐 개헌선을 넘길 것이라는 황당한 예측까지 받았던 새누리당은 물구나무를 서도 과반수를 넘길 수 없는 정치구도에 파묻혔다. 무소속 당선자와 정의당 등의 당선자를 모두 맞아드려도 제1당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과반수는 어림도 없다.

 

특히 이인제 오세훈 김문수 등 대선주자 급 중진들이 모두 낙선의 고배를 마셨고 영남지역은 물론 상승(常勝)지역이었던 강남 송파 분당에서도 노른자위를 내주는 이변이 연출되어 새누리는 사방팔방을 휘둘러봐도 안존(安存)할 곳이 없게 되었다. 이렇게 만든 것은 명색이 공천관리위원회라는 기구가 철저히 친박인사만을 선호하는데서 생겼다. 청와대의 지시를 받았는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유승민 하나만 보더라도 그렇게까지 질질 끌다가 결국 탈당을 유도하는 하지하수(下之下手)를 두고 말았다. 일찌감치 컷오프 시키거나 경선으로 가닥을 잡았다면 이런 모멸은 면했을 것이다.

 

이제부터는 두 야당이 힘을 합치면 국회의장도 그들의 몫이 된다. 국회선진화법은 개정을 공약한 새누리가 철저히 움켜쥐고 야당의 발목을 잡는 도구로 사용할 가능성도 있다. 1년 앞으로 다가선 대선을 앞두고 안철수는 부지런히 칼을 간다. 제3당의 캐스팅보트로는 대선에서 승산이 적다. 노태우정부 때 여소야대를 깬 것은 김영삼과 김종필이 노태우와 손잡고 3당 합당을 해서다.

 

김영삼은 특유의 판단력으로 김대중을 고립시키고 대선의 돌파구를 만들었고 최후의 승자로 등장할 수 있었다. 현재 새누리당의 대선주자로 예상되는 인물은 김무성이지만 총선참패의 내상(內傷)이 너무 깊다. 반기문은 아직도 국민의 여론에서는 선두주자 같지만 어느 정파에도 속하지 않고 자기 조직은 아예 없는 정치초년생이다. 이럴 때 안철수가 새누리당을 먹기 위해서 호랑이굴로 뛰어드는 김영삼의 순발력을 본받을 수도 있다.

 

물론 김영삼은 산전수전 모두 겪었던 백전노장이고 안철수는 깨끗하게 살아온 책상물림이기에 단순비교는 어렵겠지만 정치의 변화무쌍을 누가 점칠 수 있을까. 여당의 총선참패로 가장 난감하게 된 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청와대다. 그동안 박근혜는 국무회의가 있을 때마다 국회에 계류된 민생법안 처리를 미루는 야당에 대한 노골적인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야당에서는 선거법 위반이라고 앙탈했지만 대통령의 입법취지와 정책의 피력은 국민들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모든 것은 물 건너갔다. 레임덕은 원하지 않아도 찾아오게 마련이다. 수많은 인사실패와 강경일변도의 고자세는 언론과 야당의 숱한 지적의 대상이었다. 비중 있는 언론들은 사설과 칼럼을 통하여 대통령이 앞장서서 야당과의 대화를 하는 것이 민주주의 대의명분에 맞는 일임을 누누이 강조해왔다.

 

미국대통령 오바마는 거절당할 줄 알면서도 공화당의원들에게 법안통과를 부탁하는 전화를 직접 건다. 소통의 리더십은 대통령이 직접 나섰을 때 배가(倍加)된다. 박근혜대통령이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임기 말 레임덕을 걱정할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다방면에 걸친 대화와 소통을 할 수 있다면 한국민의 정서는 그쪽으로 쏠릴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총선 후의 어수선한 마음을 다잡고 새롭게 태어나는 희망의 노래를 불러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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