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의 실제 삶을 고스란히 느낀, 진짜여행

◈ <중앙뉴스> 로재성 논설위원의 시베리아 횡단기 제 4 부

 

▲ 열차에서 바라본 시베리아 풍경 © 로재성 논설위원    


◈ 겨울 시베리아를 횡단하다. [제4부]

◈ 시베리아의 실제 삶을 고스란히 느낀, 진짜여행


 

사흘간 자작나무 바다를 항해하고 있다. 하얀 들판의  하얀 자작나무 바다. 세상은 온통 흰빛뿐이다. 시베리아 벌판이 얼마나 넓기에 이틀을 달 려도 동산 하나 보이지 않는다. 일직선으로 달리는 철도길에는 터널 하나 없다. 수백 호 정도의 작은 소읍이 나타난다. 오래 전에 지어진 듯한 똑같은 모양의 개인주택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초라하고 낡은 단층주택들은 소련의 집단농장 자리인 듯하다. 대낮인데도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다.

 

시베리아 벌판에는 새가 없다. 너무나 날씨가 추워 새들이 모두 따뜻한 남쪽으로 떠나갔기 때문이다. 이 거대한 삼림지대의 하늘에 새가 없다는 느낌은 생소했고 기이했다. 이 거대한 들판에서 움직이는 것은 기차뿐이다. 나뭇가지조차 흔들리지 않는 걸 보아 바람마저 잠들었다.

 

이번에는 버드나무 바다가 나타난다. 구부러지고 휘어진 거대한 나무들이 검은 자태로 벌판을 휘감는다. 서편으로 가는 완행열차가 지나가며 요란한 돌풍과 소리를 쏟아낸다. 기차길 옆 눈밭에 두 줄의 차량바퀴자국이 십 수km 이어지고 있다. 50cm 이상 패인 걸보니 힘이 굉장한 러시아군용트럭이 아닐까. 누군가 그 트럭을 타고 겨울벌판을 가로질러 사냥을 떠난 모양이다.

 

최소 하루에서 일주일씩 걸리는 기나긴 열차여행을 러시아인들은 지루해하지 않고 잘 즐긴다. 졸리면 침대에 누워자고 배고프면 싸가져온 식량을 먹는다. 아이들은 비좁은 복도에서 잘 뛰어논다. 불과 몇 시간의 차량여행도 지루해하는 한국인들과 격이 달랐고 여유가 넘친다. 여기선 모든 게 크고 투박했다. 현대적인 것은 없었고 불편한 점이 많았으나 시계추처럼 정확했고 질서정연했으며 추운 지방에 넘치는 난방처럼 풍족해보였다.

 

오후 9시 53분. 기차가 시베리아 중부의 대도시 <노보시비르스크>에 도착했다. 인구 70만의 대도시 초입에는 거대한 강이 흘렀지만 오밤중이라 볼 수가 없다. 내가 앉은 4인실 안으로 건장한 사내 둘이 들어선다. 내가 맞는 두 번째 승객들이다. 반백의 머리에 중후한 인상의 중늙은이는 아버지였고 앳돼 보이는 청년은 아들이었다. 우리는 짧은 영어로 대화했다. 부자는 엔지니어였고 일 때문에 하바롭스크로 간단다. 한 시간 정차한 기차는 다시 떠난다. 나는 1층침대에서 잠들었다가 다시 깼다. 2층 침대에서 부자가 소곤거리는 소리에 귀 기울린다. 부자는 얼굴을 맞대고 한 시간 넘게 웃으며 대화한다.

 

새벽 1시 5분. 기차 탄지 나흘째다. 모든 승객들은 잠들었고 열차 안은 무덤처럼 적막하다. 나는 반수면 상태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노도처럼, 로마군단의 배처럼 좌우로 흔들거리며 일정한 속도로 기운차게 질주한다. 선로를 욱신거리며 질주하는 이 열차는 화려한 고속철이 아니고 아날로그적이어서 나를 감동시켰고 내 집처럼 편안한 정취를 안긴다.

 

열차가 지나는 작은 기차역과 마을들은 모두 오래되고 낡아 있었고 동화의 한 장면을 연상시켰다. 기차를 제동하는 전철기와 신호기와 플랫폼은 내가 경험한 어린 시절의 경원선 철도였지만 그 시간의 회귀는 퇴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21세기 우주시대에 아날로그적인 철도가 1700㎢나 되는 거대한 대륙에서 유일한 교통망이라는 것에 주시해야 하고 시속 70km로 달리며 옛것을 고수하는 그 완강한 전통성의 고집에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잠든 신새벽에 엔지니어 부자는 사라졌다. 영어 한 마디 못하는 아버지는 나와의 동거가 불편했던 모양이다. 어딘가 빈 자리를 찾아간 것 같다.


어둑어둑했던 하늘이 밝아온다. 눈 덮인 설원의 촘촘한 침엽수림은 성벽처럼  견고하다. 철도변을 따라가는 나무 전주들의 키가 4m 정도밖에 안돼 난쟁이를 연상시킨다. 매점에 모닝커피를 주문했더니 유리잔에 쇠로 된 잔받이를 주는데, 손잡이가 예술적이다.

 

이제 바이칼 호수까지는 24시간 남았다. 바이칼로 다가갈수록 벌판에 선 자작나무들은 더욱 크고 아름다웠다. 하얀 발레복을 입은 무용수처럼 잔가지들을 허공에 드리운 채 아리따운 자태로 춤을 추었는데, 고고한 두루미를 연상시켰다. 해가 동쪽 흐린 하늘로 떠올랐다. 회색 구름층 속에 동그랗게 뚫린 구멍으로 아침 해는 오렌지 빛 광휘를 찬란하게 쏟아냈다.

 

나흘간 5천km를 달렸는데 나는 한 번도 밖에 나가지 않고 반바지차림으로 창밖만 보며 살고 있다. 러시아 식빵과 햄, 찐 달걀, 커피로 아침 식사를 끝내자 오랜 친구인 동화약품 사장 이숭래와 연천군 면장 임재관에게서 여행 잘 하라는 문자메시지가 왔다. 5천 km를 달리니 산 하나가 나타났다. 그리 높지 않은 산이었고 서쪽을 향해 길게 누워 있었다. 여전히 기차는 터널 하나 지나지 않는다. 산기슭에 나무로 지은 개인별장인 <다차>가 가득하다.

 

오전 10시가 넘어 <크라스노야르스크>역에 도착했다. 도시옆에는 거대한 강이 나타났는데, 놀랍게도 강은 결빙되지 않았고 너른 강물 위에는 수증기가 가득하다. 공업도시인 듯 공장이 많고 큰 아파트들이 많았다. 기차는 나의 일차 목적지인 이르쿠츠크를 향해 마지막 질주를 하고 있다.

 

나는 9호실 식당칸에 가서 맥주를 사먹었다. 당나귀가 새겨진 <코젤> 흑맥주는 1874년에 창설된 회사답게 풍미가 있었다.

 

낯선땅 시베리아가 내게 무얼까. 나는 이곳에서 무얼 배우려 하는가. 닥터 지바고를 보면 지바고가 모스크바 저택을 빼앗기고 시베리아 별장으로 도피하는데, 그가 화물칸 틈으로 보는 시베리아와 내가 보는 풍경은 다르지 않았다. 철도변에는 백년이 넘은 낡은 목조주택들이 늘어서 있고 오랜 러시아 전통이 살아 있었고 수십 만년 내려온 대자연도 원시그대로 살아 있었다.

 

나는 6.25가 끝난지 몇 년 후 경원선 최북단 마을에서 태어나 증기기관차를 보며 성장했다. 내가 횡단열차에 몸을 싣고 그속에서 자유롭게 생각하고 감동하는 것은 경원선과 시베리아 열차가 정서적 공감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1월은 관광 비수기였다. 한겨울 시베리아 여행은 관광의 소란이 제거된 시기여서 시베리아의 실제 삶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진짜여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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