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바이칼 속으로 미친 듯 빠져들어갔다


◈ <중앙뉴스> 로재성 논설위원의 시베리아 횡단기 제 5부
 

▲시베리아의 푸른눈  바이칼 호수     © 로재성 논설위원    


◈ 겨울 시베리아를 횡단하다. [제 5부]

◈ 위대한 바이칼 속으로 미친 듯 빠져들어갔다

 

 

1월 11일 오전 8시. 기차가 바이칼 호수를 끼고 있는 시베리아 중부 도시 이르쿠츠크 외곽으로 접어들고 있다. 나는 우리 칸의 금발 미녀 승무원 라라에게 커피 한 잔을 주문하고 미소 지으며 인사를 건넸지만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은 마네킹 같다.

 

온종일 화장실 변기를 5분마다 청소하는 그녀는 투철한 직업의식을 갖고 있는 여전사였다. 13호 칸에서 범죄가 일어나면 그녀는 온몸을 던지며 제압할 것이다. 시베리아 횡단철도 승무원의 80%는 여자들인데 왕복 16일이 소요되는 이 기차를 타면서 가정생활을 어찌 꾸리는지 정말 궁금했다.

 

날이 밝아오는 8시 47분. 드디어 기차가 이르쿠츠크에 도착했다. 기차를 탄 후 꼬박 4박 5일만에 땅을 밟았다. 많은 승객들이 기차에서 내렸다. 차가운 공기가 목젖을 찌른다. 무거운 트렁크를 질질 끌며 고풍스러운 이르쿠츠크 역을 빠져나왔다.

 

역 광장 중앙에 기온을 알려주는 빨간 전광판이 영하 31도를 표시했다. 거리 곳곳의 가로수는 하얀 눈꽃을 흠뻑 뒤집어쓰고 있었다. 한국인 대학생과 나는 너무 추워 버스타기를 포기하고 택시를 탔다. 주택가 4층에 자리 잡은 숙소는 깔끔했다. 주인여자는 키가 컸고 기숙사 사감선생처럼 까탈스럽게 생겼다. 나는 침대에 짐을 풀고 샤워를 한 후 학생과 재래시장인 <중앙시장>을 구경하기로 했다.

 

이르쿠츠크는 수백 년 전에 지은 듯 오래된 목제주택들이 즐비했다. 지붕과 처마, 창문틀이 온갖 모양의 나무 조각품들로 뒤덮였고 그 화려한 문양과 색상은 집주인의 부와 품격을 과시했던 모양이다. 이, 삼 층의 주택들은 고풍스러웠고 기품이 넘쳐흘렀다. 나는 정신없이 사진을 찍어댔다.

 

중앙시장은 도시 한복판에 있는 거대한 재래시장이었다. 영하 30도가 넘는 맹추위에 노점상들이 과일과 바이칼 호수에서 잡은 꽁꽁 언 물고기들을 팔고 있었다. 축구장만한 단층건물 안에 들어서니 그곳이 재래시장의 본거지였다. 난방이 잘 돼 훈훈했고 많은 상점들이 늘어서 있었다. 육고기류, 물고기류, 과일, 야채, 양념, 치즈와 빵. 나는 시장구경을 하면서 돼지고기와 야채, 고춧가루, 빵을 샀다. 고려인이 분명한 아줌마한테 김치를 샀으나 배추에 고춧가루만 발라 맛이 없었다.

 

그날 저녁 내가 요리를 만들어 한국인 대학생들을 대접하며 수다를 떨었다. 앳된 여학생들이 추운 시베리아 벌판을 거쳐 바이칼로 들어가 며칠을 보낸다고 했다. 나는 그들의 열정에 감탄했고 거침없는 도전정신에 박수를 보냈다. 독일병정처럼 생긴 주인여자가 술을 먹지 못하게 내 술병을 압수해갔다. 대부분의 호스텔은 오히려 술을 파는데, 이 주인은 정말 별난 사람이었다.

 

이튿날 오전 기차에서 만난 한국인 남자 대학생과 헤어졌는데, 그는 바이칼 호수 안에 있는 <알혼섬>이라는 가장 큰 섬으로 들어가 일주일간 체류한다고 했다.  나는 중앙버스정류장까지 택시를 타고 가 바이칼 호수행 중형버스를 탔다. 드디어 바이칼 호수로 간다는 생각에 마음이 설렜다. 한민족의 선조들이 살았다는 꿈의 호수를 곧 보게 될 것이다.

 

바이칼은 시베리아의 푸른 눈, 시베리아의 진주, 성스러운 바다라 불린다. 지구상에서 가장 깊은 오지에 묻혀 있는 가장 깨끗한 물이다. 바나나처럼 생긴 이 호수는 길이가 630km, 폭이 20∼80km, 둘레가 2천km이고 면적은 3만1,500평방킬로이다. 호수면적은 미국의 5대호의 13%이지만 물의양은 3배가 많고 세계 담수량의 20%이다. 265개의 강물이 이곳으로 흘러들지만 오직 앙가라강을 통해 북극해로 흘러간다.

 

내가 탄 버스는 하류인 앙가라강을 따라 남행해 강과 호수가 만나는 <레스트 비앙카>라는 작은 마을로 간다. 15명 정도가 타는 버스는 승객이 다 찰 때까지 떠나지 않다가 11시 5분에 떠났다. 버스는 자작나무 숲을 뚫고 한참을 달렸다. 옆 자리에 젊은 처녀가 앉아 있는데, 꼭 몽골여인처럼 생겼다. 바이칼 호수를 낀 공화국이 부리야트 공화국인데, 몽골인 수십 만 명이 산다.

 

처녀가 내게 <한국인이 아니냐?>고 말을 걸어왔다. <소냐>라는 이름의 처녀는 한국어를 독학으로 공부했는데, 작년에 고려대에서 하계언어연수를 갔었다고 했다. 이번 3월초에 대구 모 전문대학으로 유학을 간다고 했다. 영어도 안 통하는 세계에서 구세주를 만난 듯 기뻤다. 그녀는 호수 옆의 <바이칼 호텔>에서 직원으로 일한다고 했다. 그녀는 나보다 먼저 버스에서 내렸다. 한 시간만에 목적지인 레스트 비앙카 마을에 도착했다.

 

레스트 비앙카라는 마을에서 버스를 내리자 엄청난 물이 내게 다가왔다. 그것은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였다. 하늘은 투명했고 햇살이 충만했으나 엄청나게 바람이 불었다. 엄청나게 옷을 껴입어도 볼이 얼어붙었다. 영하 38도의 기온이었지만 체감온도는 영하 50도는 되는 듯했다. 나는 뛰는 가슴을 달래며 호수를 향해 걸어갔다. 마을은 작은 항구였다. 작은 배들이 십여 척 정박해 있었다.

 

거대한 수면이 바다처럼 출렁거렸다. 놀랍게도 바이칼은 이토록 추운 겨울에도 얼어 있지 않았다. 거대한 수면 위로 하얀 수증기가 낮게 춤추고 있었다.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수증기 군단은 괴물처럼 흔들거리며 해가 뜬 동쪽으로 나아갔다.

 

수평선 끝은 하얀 엷은 구름층이 낮게 긴 띠처럼 떠 있었고 흰 천막을 지평선에 두르고 있었다. 내가 있는 곳의 오른쪽으로 멀리 길다란 산맥이 보였고 왼쪽으로도 시커먼 산이 보였는데, 이 산들의 높이가 2천m라고 했다. 중천에는 태양이 강렬한 빛으로 검푸른 수면을 은빛으로 만들었다.

 

나는 호숫가 얕은 곳으로 걸어갔다. 호숫가의 눈이 쌓인 곳은 얼음벌판이었지만 호수의 물은 물가의 얕은 곳까지 얼지 않아 맑은 수면 밑에 자갈밭이 환하게 드러났다. 바이칼 물은 소문대로 완전히 투명하고 거울처럼 맑았다. 나는 손을 뻗어 빈 패트병에 물을 담았고 마셔보았다. 차가운 물이 식도를 지나 온몸을 적셨다.

 

시원한 물맛이 정말 기막혔다. 나중에 나는 바이칼 물을 패트병에 담아 서울로 가져왔는데, 시베리아 열차 안에서 영상 21도의 상온에서 나흘, 난방 잘 되는 블라디보스톡 숙소에서 사흘 묵은 그 물은 일주일 후에 먹어도 맛이 기막혔다. 나는 바이칼 물은 플랑크톤이 많지 않아 물아래 수백 미터까지 보일 뿐 아니라 물자체가 지구상에 존재하는 가장 깨끗하고 우주의 신성한 기운을 받아 맹추위에서 얼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호숫가 다른 쪽에 고기잡이 배들이 정박해 있었다. 나는 열심히 사진을 찍다가 온몸이 꽁꽁 얼어붙어 한 시간만에 근방 카페로 도망쳐 들어갔다. 창가에 앉아 주문한 커피를 마셨다. 유리창 너머로 바이칼이 펼쳐 있었다. 위대한 바이칼이 나를 적시고 부수고 할퀴었다. 나는 바이칼 속으로 잠영하며 미친 듯 빠져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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