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칼, 그곳은 신이 사는 호수였다

 

◈ <중앙뉴스> 로재성 논설위원의 시베리아 횡단기 제6부

 

▲ 시베리아의 푸른눈 바이칼 호수 © 로재성 논설위원    


◈ 겨울 시베리아를 횡단하다. [제6부]

◈ 바이칼, 그곳은 신이 사는 호수였다

 


나는 바이칼을 잠시 구경하고 택시를 타고 소냐가 근무하는 바이칼 호텔로 달려갔다. 레스트 비앙카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호텔이었다. 호텔은 규모가 크고 웅장하게 지었으나 오래된 듯 낡았다. 바이칼 호수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자리잡은 호텔은 조망권이 기가 막혔다. 나는 호텔에 들어가 바이칼을 보는 순간 이르쿠츠크 숙박을 포기하고 이곳에서 하루를 묵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소냐는 프론트에서 나를 향해 미소지었다. 이 큰 호텔에 손님이 거의 없었는데, 시설이 낡았고 날이 너무 추워 관광객이 거의 없었다. 내가 이곳에서 하루 묵겠다고 하자 소냐는 경관 좋은 방을 한국 돈 3만원에 묵게 해주었다. 고풍스러운 식당에서 바이칼에서만 나는 생선 <오믈>구이를 주문해먹었다.

 

나는 호텔 창문의 탁자에 앉아 해가 질 때까지 바이칼을 구경했다. 석양에 황금빛으로 물든 바이칼은 매혹적인 자태를 드러냈고 호수전체가 동화 속처럼 환상적이고 나또한 동화 속의 인물이 되었다. 해가 진 후에 달빛에 젖은 검푸른 바이칼은 마왕이 사는 늪처럼 음침하고 기괴했다.

 

밤이 되자 호텔 밖으로 나가 동네 매점에서 러시아 포도주를 사와 나만의 만찬을 즐겼다. 안주는 모스크바에서 나온 살라미 소시지와 돼지고기 소시지였다. 중앙시장에서 산 흑빵도 무척 맛있었다. 나는 유럽에 갈 때면 늘 소시지를 사 먹는데, 한국의 소시지는 개밥 수준이다. 러시아 소시지는 독일 못지않게 종류도 다양하고 맛도 좋고 값도 싸다. 흑해지방에서 만들었다는 5천원 짜리 러시아 포도주도 일품이었다.

 

이튿날 아침 식사를 마치고 호텔 뒤에 있는 산골짜기로 올라가 스키장을 구경했다. 손님이 없는 스키장에서 스노모빌을 빌려 작동법을 배우고 30분간 신나게 스키장을 돌아다녔다. 굉음을 쏟으며 달려가는 스노모빌 속에서 내가 쓴 소설 <백두산 대폭발>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는데, 백두산이 폭발할 때 스노모빌 선수들이 도박경기를 벌이는 내용이다. 호텔로 돌아와 소냐와 작별인사를 하며 한국에 가서 공부 잘 하라고 격려해주었다.

 

밤 9시에 다시 이르쿠츠크에서 블라디보스톡행 기차를 타야 하므로 한나절의 시간이 남았다. 나는 다시 택시를 타고 어제 갔던 곳으로 향했다. 눈 덮인 언덕을 오르내리는 택시들은 바퀴에 체인을 감거나 스노타이어 없이도 기막히게 운전을 하는데, 마치 스키를 타듯 곡예를 하는 러시아 운전수들의 묘기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레스트 비앙카는 바이칼의 물이 빠져나가는 앙카라강과 바이칼이 만나는 지점의 작은 마을이다. 마을에는 <바이칼 비치>라고 불리는 해변가 비슷한 분위기의 호숫가가 있다. 호수를 바라보는 수변에 통나무로 지붕과 의자, 탁자를 칸막이 형식으로 쭉 이어 설치해놨는데, 관광철에 훌륭한 쉼터가 될 듯했다. 작은 포구에는 선착장이 있었고 어선과 관광선 몇 척이 정박해 있었다. 매주 목요일에는 바이칼 호수 외곽을 도는 관광열차가 운행되는데, 10시간 동안 운행되는 장거리코스가 있다고 했다.

 

나는 바이칼 비치에 섰다. <바이칼의 물은 겨울에도 얼지 않는다> 나는 이 충격적인 사실을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영하 35도에서 40도에 달하는 바이칼 주변은 바람이 강해 이르쿠츠크보다 훨씬 춥다. 바지 세 겹, 윗옷 네 겹, 양말 두 겹, 장갑 두 겹을 껴도 추위는 매서웠다. 얼음이 얼지 않는 바이칼은 바다처럼 도도하게 잔물결치고 있었고 하얀 수증기 군단을 수면 위에 띄우며 침묵 속에 드센 위용을 과시하고 있었다. 바이칼은 얕은 호수변의 물도 어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바이칼의 도도한 품격, 거칠지 않는 조용한 위용은 맹추위마저 몰아내고 있었다.

 

며칠 후 나는 블라디보스토크의 항구에서 거대한 군함들이 떠 있는 항구의 바닷물이 추위에 꽁꽁 언 모습을 보고 얼지 않는 바이칼이 더욱 신기했다. 영하 20도에서 블라디보스토크 바닷물은 얼어붙었는데, 영하 40도의 바이칼 민물이 얼지 않는 것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바이칼은 일반적인 호수가 아니었다. 그곳은 신이 사는 호수였다.

 

평소에는 검푸른 물빛을 띄다가 해가 뜨면 은빛으로 출렁거리고 석양에는 황금빛으로 변하는 바이칼은 태양이란 존재마저 무대의 조명처럼 도구로 만들어버린다. 바이칼 호수변은 물이 유리알처럼 투명했고 물바닥에는 주먹만한 둥근 돌들이 이끼 하나 없이 깨끗한 자태를 드러냈는데, 누군가 솔로 돌을 박박 문질러 유리수조에 금방 넣은 자태였다. 나는 호숫가 얼음판이 미끄러워 아이젠을 운동화 바닥에 채우고 호숫물을 다시 패트병에 담았고 서울에 가져가려고 배낭에 넣었다.

 

우리 민족은 한반도에 들어오기 전 바이칼 호수변에 살았을지도 모른다. 몽골에는 무지개를 따라 남쪽으로 간 몽골족이 있었고 그것이 우리 민족이라는 전설이 있다. 몽골의 겨울은 춥고도 길다. 겨울에도 풀이 자라는 목축지를 확보하지 못하면 굶어죽으니까 목축지를 두고 부족간 혈전을 벌여야 했고 그것이 세계최강의 전투력을 기르는 원동력이었다. 지긋지긋한 혈전을 피해 남쪽 반도로 이동한 순하디 순한 부족이 우리 한민족이었다.

 

바이칼 초입에서 하루를 머물렀지만 바이칼에 푹 빠졌다. 며칠 더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일었다. 레스트 비앙카 마을의 재래시장에 들러 순록꼬치를 사먹고 간단한 기념품을 샀다. 날이 저물고 있었다. 황금빛으로 물든 바이칼을 바라보며 한참 감상에 젖었다. 바이칼이여, 신록이 푸르른 날에 다시 너를 만날 것이다.

 

바이칼 관광을 마치고 다시 버스를 타고 이르쿠츠크로 돌아왔다. 숙소로 돌아가는 택시를 탔는데, 기사와 택시비를 흥정해야 했다. 영어도 안 통하는 곳에서 목적지를 알려주고 손짓발짓으로 흥정하는 것은 고역이다. 숙소에 도착해 짐을 다시 꾸렸다. 슈퍼마켓에 가서 바이칼 호수 물로 만든 보드카 두 병과 생수, 먹을 것을 샀다.

 

저녁 8시에 숙소에서 택시를 타고 이르쿠츠크역으로 갔다. 블라디보스톡까지 가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야한다. 1월 13일 밤에 타서 17일 아침에 내리는 대장정이다. 이번에는 6인실이고 2층 침대라 불편할 것이다. 나흘간 책장의 책처럼 끼워져 실려갈 것이라는 예감이 날 무겁게 했다.

 

1월 13일 오후 9시 15분. 이르쿠츠크역의 플랫폼에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멀리서 시베리아 횡단기차가 선로를 욱신거리면서 달려와 플랫폼에 멈춰섰다. 무거운 트렁크를 다시 승강구에 올리면서 바이칼이 있는 시베리아 중부도시 이르쿠츠크와 작별인사를 했다. 눈보라가 얼굴을 때렸고 기차는 서서히 다시 움직였다. 이제는 시베리아 중부에서 동쪽을 향해 달려갔다. 한반도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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