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만 더 타고가면 대장정의 닻을 내린다

 

◈ <중앙뉴스> 로재성 논설위원의 시베리아 횡단기 제8부

 

▲ 시베리아 횡단열차 내부  ©  로재성 논설위원   



◈ 겨울 시베리아를 횡단하다. [제 8 부]

◈ 하루만 더 타고가면 대장정의 닻을 내린다

 

 

제 8부

 


시베리아 동쪽을 달리는 기차에서 사흘째 날을 맞이하고 있다. 전나무들이 푸른 이파리를 몽땅 떨군 채 앙상한 줄기와 가지만으로 숲을 시커멓게 물들였다. 하얀 자작나무 사이로 불에 그을린 듯한 전나무 숲은 삼림지대의 또 다른 매력을 풍겼다.

 

나는 열차의 왼쪽 시베리아 북쪽 창가에 앉아 벌판을 조망한다. 해가 벌써 서녁으로 기울어 내가 앉은 창가와 벌판의 하단을 그림자로 가리고 나무들 상단은 기운 해에 빛나고 있다. 오렌지 색 태양은 서녁하늘에 주단을 깔았고 북쪽 들판의 삼림은 벌써 음울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기나긴 화물열차가 반대차선에서 지축을 울리며 지나간다. 화물열차는 끝없이 길고 열차의 기적소리는 한서린 여인의 울음처럼 처량하다.

 

6인실 차에서 최악의 자리는 2층 침대다. 창가에 앉은 두 사람은 아래층을 지배하는데, 그가 눕고싶으면 1층 복도쪽 자리에 앉아 있던 2층 사람들은 천정 밑으로 올라가 천정만 보며 시간을 보내야 한다. 시베리아 서쪽에서는 창가를 지배했던 나는 동쪽에서는 큰 도서관의 볕이 안 드는 구석에 꽂힌, 누구도 읽지 않는 책 한 권이 돼 습기에 젖은 채 곰팡이를 피우는 기분이다. 열차천정과 침대바닥의 60cm 공간에 갇힌 나는 스페인 노예선 창고에서 발가벗겨 꼭꼭 포개져 실려가며 점점 미쳐버리는 잉카의 노예가 내 신세라고 한탄한다.

 

어느덧 밤이 찾아왔다. 아래층의 절대자인 이반 아저씨와 뚱뚱한 그의 부인이 아래층에서 나란히 코를 고는데, 모두가 잠이든 13호실은 열차바퀴의 단속음에 맞춰 좌우로 흔들거리며 잠의 합창을 토해내고 있다. 나는 그들의 다양한 비음에 취한 채 불면의 밤을 지키고 있다. 시베리아 열차에서 잠자는 군상은 행복하다. 나는 잠을 포기하고 자리에서 내려와 식당 칸으로 발을 옮겼다.

 

문뜩 1995년 11월의 한 영상이 떠오른다. 나는 시인 서정주 선생과 독일의 <본>대학에서 열린 세미나에 참석하고 있었다. 당시 나는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의 문학미술부장이었는데, 본대학과 우리는 유럽의 수많은 한국문학 교수나 번역가들과 한국문학 세미나를 열었다. 세미나가 끝나고 선생을 모시고 독일열차를 타고 쾰른으로 가 쾰른대성당을 구경하고 한국대사관의 저녁만찬에 참석했다. 대시인을 맞으러 독일대사는 물론 오스트리아 한국대사까지 먼길을 달려왔다. 식사시간 내내 시인은 니케에 대한 엄청난 지식을 쏟아냈는데, 그의 현란한 수사에 참석자들은 말을 잃었다.

 

며칠 그를 보좌했던 나는 그의 표정이 굳어 있었고 심사가 불편한 기미를 느끼고 긴장하고 있었다. 그날 점심 전두환, 노태우 두 전대통령이 구속되는 뉴스를 본 다음부터였다. 그 중 한 사람과 친분이 남달랐던 시인은 오랜 세월 그 인연 때문에 곤혹을 당했는데, 그가 구속되자 다시 자신이 언론에 부각되는 것이 싫었던 모양이다.

 

나는 호텔로 돌아오는 차중에서 시인을 위로했다. 한 달 전 우리 부서는 한국문학 평론가 300인에게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작고, 생존을 막론하고 한국 최고의 시인은 누구인가 하는 비공개 설문조사였다. 서정주 시인이 소월을 제치고 1위였고 그 소식을 전하자 시인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일주일 넘는 해외여행을 가는데, 후줄근한 옷차림에 007가방만한 작은 보자기에 속옷 몇 장과 양말만 넣어오셨다. 찐 달걀 몇 개를 들고 이웃집에 마실가는 할아버지 같았고 그의 자유로움이 그의 시처럼 빛을 발했다.

 

점심이건 저녁이건 맥주만 마시던 시인은 독일의 흑맥주를 아주 좋아하셨다. 나는 식당칸으로 가 21년 전 쾰른행 기차 안에서 시인과 먹은 <Five Mountain>이라는 독일 흑맥주 대신 러시아산<Zlaty Bazant>라는 흑맥주를 들이키며 그의 시를 암송했다. 쾰른행 반짝거리는 현대식 열차는 21년이 지나 낡은 러시아 열차로 바뀌고 맥주병을 쥔 승객은 문화공무원에서 가난한 소설가로 바뀌어 차가운 시베리아 벌판을 달리고 있다.

 

식당칸에서는 러시아 민요가 흘러나왔고 러시아 청년들이 버드와이저를 마시며 떠들고 있다. 러시아 승객들은 횡단열차의 풍속을 즐겼다. 그들은 장거리 열차를 탈 때 반팔 티와 추리닝 바지와 슬리퍼를 꼭 준비해오고 먹거리를 넘치도록 가지고 온다. 모두다 초여름 복장을 하고 창밖으로 흐르는 겨울 시베리아의 얼어붙은 삼림과 벌판을 관람한다. 장시간 정차하는 역에서 뛰어내려가 먹을 것을 사온다. 나도 플랫홈에서 순대를 파는 아줌마를 기대했으나 한겨울이라선지 보이지 않는다.

 

기차가 8박 9일을 달릴 만큼 러시아 땅덩어리가 왜 이리 클까? 칭기스칸이 죽은 뒤 그의 용맹한 손자들은 러시아 땅을 휘젓고 다니며 무수한 도시국가와 공국으로 갈라져 있던 러시아를 한 땅덩어리로 통합해 그들을 지배했다. 러시아 귀족들은 그들을 지배하는 몽골군 총사령관이 거처하는 노란 색 텐트(게르)를 <짜리>라고 불렀고 나중에 러시아 황제를 그렇게 불렀다.

 

식민지가 되는 바람에 대박이 난 국가가 이 세상에 둘 있는데, 남의 힘으로 대국이 된 러시아와 중국이었다. 중국은 청나라가 지배하며 땅을 세 배로 늘려주었는데, 청나라가 없었다면 중국은 300만 평방킬로의 중견국가로 끝났을 것이다. 이것은 평생 중국제국의 땅넓이만 연구해온 일본학자의 주장이다.

 

문자메시지가 하나 들어왔다. 딸에게서였다. <아빠, 나 오늘 생일이에요. 잘 있죠???>나는 답장메일을 써 보냈다. 딸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기과 학생이다. 재작년 늦가을 14,700명이 응시해 37명만 합격한 축에 딸이 끼었을 때 몹시도 기뻐했다. 딸은 어릴 적부터 춤과 노래, 연기를 좋아했다. 중학교 3학년 때 오디션을 봐 유명기획사의 연습생으로 들어갔을 때 학교를 다니지 말라는 기획사의 공장 시스템에 반발해 그만 두고 안양예고에 들어갔건만 나는 남들처럼 딸을 돕지 못했다. 그래도 용케 홀로 공부해 가시밭길인 연기자의 꿈을 키우고 있다.

 

차창 밖 캄캄한 시베리아 벌판을 바라보는 것도 운치가 있다. 러시아 치즈는 과한 냄새가 나지 않아 내 입맛에 맞았고 돼지고기와 비계를 넣은 소시지도 맛있다. 러시아 식빵은 보통 한 덩어리가 4,5십 루블인데, 정말 크고 싸고 맛있다. 이 나라 식빵을 보면 굶어죽은 사람이 없는 게 확실하다.

러시아 숙소에서 재밌는 것은 내국인이건 외국인이건 거주자 등록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이르쿠츠크 호스텔에서는 매일 100루블을 거주자 등록비로 지출했는데, 무슨 말인지 모를 러시아어 가득한 종이에 서명을 해야 했다. 어느 곳을 가던 거주자 등록을 하지 않으면 경찰에 잡혀 간단다. 거주자를 감시하던 사회주의의 잔재 같았다.

 

시베리아 벌판에서 처음으로 반달이 떴다. 달은 캄캄한 대지 위에 희미한 빛으로 벌판의 곳곳을 아슴푸레 비추고 있다. 창백한 달의 기운을 받은 하얀 들판은 삼림의 모양을 수묵화로 보여주고 있었다. 시베리아의 조각달은 오늘따라 외롭고 처량하게 보였다. 이제 하루만 더 타고가면 이 기차는 대장정을 끝내고 블라디보스토크에 닻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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