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마침내 해냈다

 

◈ <중앙뉴스> 로재성 논설위원의 시베리아 횡단기 제 9부

 

▲ 블라디보스토크 역     ©  로재성 논설위원   


◈ 겨울 시베리아를 횡단하다. [제 9 부]

◈ 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마침내 해냈다

 

 

 

   제 9부

 

                  

오늘은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마지막 날이다. 이제 24시간 후면 기차는 종착역에 도착할 것이다. 나흘째 열차는 사나운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며 기운차게 달려가고 있다. 대체 이 짐승은 숱한 나날을 달려와도 지친 기색이 없다. 2층 침대와 천정 사이에 끼어 며칠을 보냈는데, 독방죄수가 따로 없었다. 침대에서 내려오니 1층의 이반아저씨 부부는 사라졌고 통조림 하나와 물병 하나를 탁자에 남겼는데, 외국인인 나를 배려한 것 같아 그들의 성의에 감탄했다. 나는 이반이 앉았던 1층 창가에서 커피를 마신다.

 

아침 6시 18분. 시베리아 벌판이 어렴풋이 밝아온다. 동부 시베리아는 산이 몇 개 보인다. 끝없는 지평선만 이어지던 서부 시베리아와는 확연히 다르다. 나무들 크기도 조금 작다. 아침인데도 달빛에 젖은 들판을 바라보는 느낌이다. 얕은 구릉은 어두침침하고 그 위의 하늘은 희미하게 빛이 차오른다. 이곳부터는 시간대가 서울보다 1시간 빠르다.

 

나는 열차만 8박 9일을 타는 시베리아 횡단이 무척이나 지루할 줄 알았다. 내가 볼 수 있는 것은 열차의 차창뿐이다. 하지만 그 오랜 시간동안 창밖의 풍경은 매 순간 모든 것이 달랐다. 개발의 역겨운 현장만 보고 산 나로서는 거대한 나라의 살아 있는 대자연에 경외심을 느꼈다. 나는 중국을 수십 번 가봤지만 그곳은 철저히 파괴된 오염덩어리였다. 공직을 그만두고 제주도에서 5년을 살아봤지만 제주도는 무계획한 난개발로 무너져가는 곳이었다.

 

해안가는 수백 킬로의 해안도로와 수백 개의 콘크리트 포구, 난립한 건물들로 다 망가졌다. 국제자유도시를 섬에다 세우겠다는 제주인의 몰상식에 질려버렸다. 시베리아 9천km를 달리는 동안 인적 하나 없이 펼쳐지는 대자연의 살아 있는 풍경에 압도당했다. 때 묻지 않는 대자연을 잘 보호해온 러시아는 미래가 있었다. 러시아의 부는 석유가스와 살인무기가 아니라 대자연이었다.

 

오전 6시 47분. 하늘이 더욱 밝아졌다. 삼림의 모습은 더욱 또렷해졌다. 기차는 작은 간이역에 멈췄지만 플랫폼이 없다. 시골아낙네와 중년 사내 둘이 승강구에 허겁지겁 오른다. 두터운 털모자와 외투로 감싸 얼굴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간이역의 정차시간은 1분이다. 나는 움직이지 않고 멈춰 있는 시베리아 벌판을 바라본다. 1백여 호의 작은 마을이었고 유독 한 집의 지붕에서만 굴뚝으로 하얀 연기가 솟구친다. 기차역도 무척 작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수많은 간이역에 자주 정차하는 것이 특색이었고 그것 때문에 묘미가 있었다. 재작년 여름 드넓은 만주벌판에서 타본 중국의 고속철에서 어떤 감흥도 느낄 수 없었다. 총알처럼 지나가는 만주벌판과 느린 속도로 꾸역꾸역 나아가는 시베리아 벌판은 정서적 간극이 너무나 컸다. 시베리아 벌판은 이른 시각에 완전한 모습을 드러냈다. 시간대가 빨라졌기 때문이다. 이곳의 삼림은 자작나무와 낙엽송이 주축이다.

 

오전 7시 4분. 시베리아 노선에서 처음으로 터널 하나를 지난다. 길이는 1분 정도. 다시 벌판이 나타난다. 키 작은 관목숲 너머로 멀리 거대한 산맥이 시커먼 자태를 드러낸다. 산너머가 붉게 붉들어가는 것으로 봐 태양이 곧 떠오를 것 같다. 온통 눈덮인 하얀 벌판. 대지가 온통 흰빛이기에 뒤에 웅크린 산들은 검었고 그 위에 펼쳐진 하늘에 태양은 머리를 들어올리며 산과 하늘을 붉게 물들인다. 들판을 가로지른 송전탑과 몇줄의 전선들이 아침 햇살에 창백하게 빛난다.

 

오전 7시 21분. 꽤 큰 마을이 남쪽 창가에 나타났다.  수많은 하얀 지붕의 굴뚝에서 흰 연기가 솟구치는데, 수백 개의 연기기둥들이 밝아오는 아침 하늘을 찌르는 모습은 정말 장관이다. 매서운 추위 때문에 연기기둥이 선명하게 보이는 것도 겨울 시베리아 특유의 풍경이다. 나뭇가지가 흔들리지 않는 걸로 봐 바람조차 잠들었다. 동부 시베리아의 자작나무는 유난히 하얗다. 마치 나무전체에 하얀 페인트를 칠한 것처럼 순백색이다. 아침햇살을 받아 보석처럼 빛나는 자작나무 군락은 숲속의 여왕이었다.

 

▲ 블라디보스토크 역 © 로재성 논설위원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떠보니 오후 3시 40분. 거대한 강이 나타났다. 시베리아 동부의 대도시 하바롭스크로 들어가기 직전이다. 강 넓이가 3∽4km는 될 듯했고 하얗게 얼어붙었다. 철교의 길이도 무척 길다. 남쪽 벌판에 거대한 공장지대에서 우뚝 치솟은 굴뚝에서 거대한 연기기둥이 뻗어나온다. 검은 외투에 털모자를 쓴 여승무원은 기차에서 내릴 준비를 한다. 3시 57분. 많은 승객들이 하바롭스크 기차역에 내린다. 이곳에서 기차는 1시간 정차를 한다. 오랜 만에 플랫폼에 내려 역내를 어슬렁거렸다. 날이 너무 추워 다시 자리로 돌아가서는 빵과 치즈를 먹었다.기차가 다시 떠난다.

 

오후 5시 19분. 붉은 석양이 시베리아 벌판을 물들인다. 철로변에 거대한 공동묘지가 나타난다. 크고 작은 비석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시베리아인들은 사는 곳이 너무 넓어 죽어서는 가깝게 묻히는 모양이다. 횡단열차에서 보는 마지막 석양이다. 이제 태양은 남쪽에 위치했는데, 기차가 동쪽끝으로 많이 달려온 까닭이다. 하루에 1,400km씩 달렸고 지구의 1/4을 돌았고 일곱 시간대를 돌파했다.

 

오후 5시 29분. 태양이 하늘에 오렌지빛 구멍을 통해 마지막 모습을 드러낸다. 벌판은 온통 흰색이고 삼림은 점점 검은색으로 물들어간다. 오후 5시 51분. 저녁 이내가 짙어져가는 들판은 어둑어둑하고 기차 안도 어두워졌다. 태양은 다시 떠오르지 않을 듯이 모습을 감췄고 온 들판이 어둠에 푸근하게 잠긴다. 이 마지막 밤을 위해 기차는 힘차게 진군하고 이 밤이 걷히면 횡단열차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나는 저녁기차의 소란에서 빠져나와 12호차 입구의 쓰레기 보관실에 들어와 보관함 뚜껑에 앉아 노트에 여행기를 끄적거린다. 넓이는 반 평정도고 맞은편에는 사용하지 않는 화장실문이 달렸고 기온은 영상 15도 정도로 쾌적하다. 내일 새벽에 내릴 종착역 블라디보스톡은 어떤 도시일까. 이름 모를 간이역에서 온통 검은 옷을 입은 젊은 여인이 큰 가방을 들고 승차한다. 닥터 지바고에서 지바고의 아내를 보는 듯하다.

 

나는 내 자리로 돌아와 사흘간 누워 있던 침대를 정리하고 트렁크를 정리했다. 나는 남은 포도주를 마지막 밤을 위해 마셨다. 그리고 벗어놓았던 옷을 다시 껴입었다. 1층 침대에서 잠이 들었다. 돌고래만한 거대한 물고기와 커다란 거북이가 하늘을 날아다니는 꿈을 꾸었다.

 

잠에서 깨어보니 기차는 블라디보스토크 시내로 들어갔다. 러시아 건물들은 건물 귀퉁이 모서리에 기다란 전등을 달아 기이하게 보였다. 나는 한 가지를 후회했다. 횡단열차를 타면서 차창으로 무수한 사진을 찍었지만 동영상을 단 한번 찍지 않았다. 그런들 어떠랴. 많은 영상들은 내 머리 속에서 살아서 움직였다.

 

오전 6시 57분. 기차가 종착역에 도착하며 커다란 한숨을 토해냈다. 나는 트렁크를 들고 승강구에서 내렸다. 드디어 시베리아 대장정이 끝이 났다. 나는 곰처럼 튼튼한 러시아 열차를 타고 9,334km를 달려왔다. 250개의 기차역에 정차했고 스쳐지나간 역은 그보다 서너 배는 많았다. 플랫폼의 차가운 공기가 폐부를 적셨다. 마침내 해내지 못할 것 같은 힘든 여정을 끝마쳤다. 절로 웃음이 터져나왔다. 마침내 해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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