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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홀가분한 감정

  이수니

 

 

 

 자루가 빠진 프라스틱 빗자루

 어느 헐거워진 곳을 쓸면서 왔을 것이다

 지저분한 앞길을 만날 때마다

 깨끗한 뒤를

 흘깃거리며 왔을 것이다

 

 어느 해는 꽃핀 나무 밑을 쓸어낸

 호사(好事) 뒤에,

 뜰엔 놓인 몇 켤례

 신발을 묵묵히 쓸어내었을 것이다

 번잡한 자루에서 벗어난 빗자루는

 고래의 꼬리지느러미가 되거나

 맹수의 갈기가 되는 꿈을 꾸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존재를 바꾸는 일은

 별일 축에도 못끼는 일

 붙어 있는 그 무엇 하나 쑥 빠지는 일이다

 소나기 빠져나간 구름의 부피만큼

 머뭇머뭇해지는 날씨다

 

 영역이었던 곳, 닳은 곳이 없다

 돌이켜보면 깨끗이 하려던 곳들만 닳아 있다

 자루가 빠진 빗자루

 누구의 손아귀에서도 벗어난,

 자유의 깃털처럼 고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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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가촉천민보다 더 낮은 계급이 있다면 그것은 빗자루일 것이다. 평생 바닥만 쓸다가 제 몸 다 닳고 자루가 빠져버리는 빗자루는 가을날 추수를 마친 텅 빈 들판의 이미지와 흡사하다고나 할까? 자루가 쑥 빠지고 몰골 초라한 몽당 빗자루를 보면 어쩌면 다 비운 자의 여유가 읽혀지기도 한다. 평생을 더러운 것들만 깨끗하게 쓸어내다 제 몸 다 닳아 자루만 남은 빗자루!   평생을 희생하는 삶만 살다간 어느 어머니, 아니 아버지의 모습은 아닐까? 하지만 그에게 남은 홀가분한 감정 또한 알 것도 같다. 더 이상 쓸모가 없어졌다고 느끼게 될 때 비로소 참자유를 쟁취한 듯한...

[최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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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니 시인 /

경남 진주 출생

2015년 월간 <시와표현>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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