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뉴스=이윤범 교수 칼럼]한류(韓流)라는 단어는 1990년 대 후반 중국에서 처음 생성되었다. 동시에 부정적인 의미로 갑작스런 강추위가 몰려 왔다는 한류(寒流)라는 의미도 동시에 그 곳에서 만들어졌다.

 

한국문화가 중국 전역에 퍼져나가면서 순항하는 중요한 순간에 “사드”라는 복병을 만났다. 그야말로 우리에게 강추위가 몰려와서 우리 경제에 상당한 타격을 주고 있다.

 

우리 경제가 중국에 의존하는 부분이 큰 만큼 충격도 만만치가 않다. 사드의 여파가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을 예상하는 거의 모든 분야의 전문가들은 중국시장을 대신할 수 있는 대안 찾기에 분주한 모습이다. 그들이 대체로 제시하는 대안이 바로 신흥 개발도상국인 베트남이다.

 

베트남은 사회주의 국가이다. 75년에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을 흡수하여 통일을 달성하였다. 북베트남 정부는 그 동안 미국의 지배하에 자본주의를 시행하였던 남베트남을 사회주의화 시키려고 하였다.

 

그 시도는 결국 실패로 이어졌고, 경제가 파탄나자 1986년 자본주의를 받아 들였다. 사회주의 체제와 자본주의는 서로 상충하는 것을 알면서도 베트남 정부는 특유의 유연성을 발휘해서 시장경제를 받아들인 것이다. 경제개혁 이 후 90년대부터 경제가 회복되기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거의 30년 동안 고도성장을 이어오고 있다. 아시아에서 중국 다음으로 지속적인 고속 경제성장을 달성하고 있는 것이다.

 

베트남이 이처럼 장기간 경제성장을 이루기까지 수많은 역경을 극복해야만 했었다. 거의 100년 가까이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받아온 베트남은 프랑스와 긴 전쟁 끝에 자력으로 항복을 받아 내어 독립을 이루었다. 뒤이어 미국이 베트남에 지배권을 확보하려하자 8년 동안 치열한 전쟁을 치른 끝에 통일을 달성하였다.

 

고대시대에 1000년 이상이나 중국의 직접지배를 받아온 베트남의 역사는 최근까지 그야말로 전쟁의 연속이었다. 베트남은 무수한 전쟁의 여파로 비록 좀 늦은 감은 있지만 경제적으로 많은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베트남이 독립하고 통일을 이루기까지 그 반석을 만든 사람이 호찌민이다. 그래서 그는 베트남인들의 존경을 받는다. 베트남 국민이 그를 존경하는 이유는 평생 동안 조국의 독립과 통일을 이루기 위해 개인의 일생을 국가에 헌납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프랑스의 지배를 벗어나기 위해 30년이나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였고, 귀국 후에 정부를 구성하여 독립을 이루었다. 1969년 미쳐 통일을 보지 못하고 서거하였지만, 그 누구도 베트남의 통일이 호찌민의 업적이라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다.

 

그가 사망하자 미국과의 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10만 명 이상이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였다. 그의 서거에 세계각지에서 애도를 표하기 위해 보내온 전보만 해도 2만 2천통이 넘었다. 더구나 당시 전쟁 상대국이었던 미국의 가장 영향력 있는 시사주간지 TIME지는 표지모델로 그를 등장시켰다.

 

당시에 한국군도 베트남 전에 참전하여 이 모습을 보았지만, 워낙 반공의식이 강한 한국은 공산주의자인 그의 존재를 크게 인정하지 않았다. 더구나 경제적으로도 열악한 동남아시아 변방지역의 조그만 국가 지도자인 그를 주의 깊게 볼 수 있는 여유가 없었다.

 

90년대 이 후 베트남의 경제가 발전하고 수많은 한국인들이 관광과 투자를 명목으로 베트남과 관계를 확대하면서 베트남의 국부라 할 수 있는 호찌민 주석에 대한 관심이 새로이 부각되고 있다. 그의 사상이나 업적이 충분히 조사되고 연구되지 않은 상태에서 난데없이 정약용 선생의 목민심서가 회자되고 있다.

 

그가 가장 존경했던 사람이 정약용 선생이고, 그가 가장 소중하게 탐독했던 책이 목민심서라는 것이다. 심지어 그의 머리맡에 목민심서를 두고 잠을 청할 만큼 끔찍이 그 책에 몰입했다는 소문이 우리 많은 한국 사람들 입에 회자되고 있다.

 

한국학자들 중에서 비교적 호찌민을 많이 연구하고 있는 필자로서는 답답함을 금할 수 없다. 베트남에서 발간되는 호찌민에 대한 수백 종의 자료 어디에서도 목민심서는 등장한 적이 없다. 호찌민의 일대기를 보면 그가 유년시절에 유교교육을 받고 자란 연유로 중국의 손자병법과 쑨원 등 중국인들의 저서는 많이 탐독한 것으로 나와 있다.

 

더구나 손자병법은 베트남이 치른 전쟁에서 실제로 적용한 사례가 기록에 많이 남아 있다. 한국 내에서도 그동안 베트남을 연구하는 수많은 학자들이 학술회의에서 호찌민과 목민심서는 아무 상관관계가 없다는 것을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카더라”라는 소문은 줄어들지 않고 있다.

 

아마도 이런 소문은 우리의 우수성을 과시하고자 하는 국수주의적인 영향으로 보인다. 그러나 전혀 근거나 기록을 찾을 수 없는 막연한 소문을 기정사실화 하는 것은 국민을 호도할 수 있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볼 때 “공(功)”도 많았지만 “과(過)”도 적지 않았던 이웃나라의 지도자를 사사로이 평가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현재 베트남에서 학교 교실마다 그의 사진과 어록이 부착되어 있을 정도로 존경받는 그를 우리의 정서에 굳이 연관시키고 싶지 않을 뿐이다. 마치 수년전 냉혹한 프로세계인 미국 다저스 야구구단에서 활약했던 박찬호 선수가 그 구단 감독의 “양(養)아들”이라고 우리 정서대로 해석하고 흥분했던 기억이 생생하기 때문이다.

 

 

청운대학교 베트남학과 이윤범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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