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는 일반시민으로부터 나온다.

 

▲ 김정겸 교수     ©중앙뉴스

에로스(Eros)와 프쉬케(Psyche)의 사랑은 그리스 로마신화에 나오는 이야기 이다. 에로스(Eros)는 아름다움(미:美)의 여신인 아프로디테의 아들이며 ‘사랑’의 신이다. 프쉬케(Psyche)는 희랍어 ‘나비’를 의미한다. 

 

'먼저 생각하는 사람, 선지자(先知者)'이라는 뜻의 프로메테우스(Prometheus)는 흙으로 인간을 빚었다. 몇 일 동안 볕에 말리고 생명을 불어넣을 때 지혜·전쟁·문명의 여신인 아테나(Athena)가 나비를 날려 보냈다. 나비[프쉬케(Psyche)]가 그 인간의 콧구멍 속으로 들어감으로서 영혼을 갖게 된다. 그리스 로마신화는 단순히 신화를 넘어선 역사, 철학,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준 것이다.

플라톤에게 있어 정의(正義:justice:dike)란 무엇인가? 

 

정의의 여신인 dike(디케)는 눈을 가린 채, 한 손에는 칼을, 또 다른 한 손에 저울을 들고 있다. 이는 법의 공명정대함을 의미한다. 

 

플라톤에게 있어 정의는 우리 인간의 영혼이 조화로울 때 이루어진다. 인간은 3가지 영혼, 즉 머리의 이성, 가슴의 기개, 배의 욕망을 갖고 있다.

 

통치자는 이성적 덕(德)인 지혜를 발현해야 하며, 군인. 경찰 계급인 수호자는 기개의 덕인 용기를 발현해야 하며, 생산계급인 일반시민은 욕망의 덕인 절제를 해야 한다. 이 3가지 덕이 조화를 이룰 때 정의가 이루어진다. 

 

플라톤에게 있어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사람은 ‘좋은 사람’ 이다. 좋은 사람은 생각을 지혜롭게, 가슴에 용기를, 욕망을 절제하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 상태를 정의롭다라고 한다.

플라톤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단계를 거친다. 먼저 생산자, 다음으로 수호자, 마지막으로 통치자 이다. 결국 정치인은 생산계급인 일반 시민으로부터 형성 되는 것이다. 또 정의는 세 계급의 직분에 맞는 일에 최선을 다하여 조화를 이루는 것이 국가 전체의 조화가 이루어져 국가의 정의가 실현될 수 있다.

 

플라톤의 정의로운 국가는 각 사물에 부여된 능력인 에르곤(ergon)이 올바르게 실현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국가라는 공동체 안에서만 자신의 에르곤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국가는 무엇을 해야 할까? 국가는 일반 시민의 다양한 능력과 본성을 실현 시킬 수 있는 공동체이다. 따라서 통치자는 일반 시민의 능력인 ‘에르곤’을 영혼을 불어 넣음으로서  창조적 활동[‘에네르게이아’(energeia)]을 하는 자이어야 한다.

 

일반 시민의 행복을 확보하기 위한 전제 조건은 국가의 행복, 즉 국가의 정의를 실현하는 일이다. 플라톤이 지향하는 정의는 사회 전체의 영혼, 즉 공동체에서의 영혼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고 본다.

공동체와 관련하여 요즘 유행하고 있는 단어 하나가 있다. 우분트(Ubuntu)이다.

 

아프리카 부족 연구를 위해 반투족 아이들에게 그 지역에서는 맛볼 수 없는 딸기를 담은 바구니를 매달아 놓고  ‘1등으로 도착한 아이가 그 딸기를 다 먹을 수 있다’는 게임을 시켰다. 우리가 흔히 하는 예상 달리 아이들 모두 손을 잡고 가서 딸기를 함께 나누어 먹었다. 경쟁을 하지 않고 함께 걸어간 이유를 묻자 아이들이 일제히 “우분트!”라고 외쳤다.

 

‘우분트’는 ‘네가 있기에 내가 있다(I am because you are)’라는 뜻이다. 이 일화는 넬슨 만델라 대통령에 의해 알려지기 시작했다.

정치인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우분투 정신, 즉 ‘국민이 있기에 내가 존재한다(I am because people are)’을 인식해야 한다. 국민의 분열자가 아닌 국민을 통합하고자 화합과 조화를 꾀하는 정치인이어야 한다. 그래야 국가 전체의 정의를 실현할 수 있다.

 

정치인은 플라톤의 「국가」에서 강조하는 의무감을 갖어야 한다.  즉, 동굴 안에의 그림자를 자신의 참된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우매한 국민을 동굴에서 햇빛으로 인도할 수 있는 길잡이가 되어야 한다. 그 반대로 정치인 자신이 동굴에 사로 잡혀 있어 참된 진리를 못 본다면 이는 세상을 어둡게 하는 자이고 우분트를 깨고자 하는 자이며 정의를 실현 할 수 없는 자이다.

 

더 이상 우리로 하여금 정치인을 의심하게 하지 않도록 행동했으면 좋겠다. 그들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 하나가 우리의 관심사이다. 왜냐하면 그들을 통해 우리는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의심이 자리 잡은 ‘프쉬케(마음)’속에 ‘에로스(사랑)’가 있을 수 없다. 그들을 사랑할 수 있도록 참된 정치를 하였으면 한다.

 

/김정겸/한국외국어 대학교 철학과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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