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은 덕과 윤리를 갖춘 실천적 현명함을 지닌 자이어야 한다.

▲ 김정겸 교수     © 중앙뉴스

[중앙뉴스=김정겸] 정치는 공학적이어야 하는가 아니면 실천적이어야 하는가?

정치 공학[政治工學]이란 수량적ㆍ통계적 방법을 통해 정치를 관찰, 분석하는 것이다. 즉, 양적이고 물상적인 기계적인 요소를 가지고 정치 현상에 접근하려는 학문이다. 이론적이다. 정치현상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정치는 프로네시스(phronesis)이어야 한다.

 

프로네시스를 실천적 현명함 또는 실천지라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소피아'와 '프로네시스'의 2종류로 지식을 나누어 설명한다. '소피아'는 행위 함과는 무관한 이론적 활동을 의미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론(theory)과 실천(praxis)을 서로 매개 할 수 있는 것을 ‘프로네시스’로 보았다.

 

‘프로네시스’는 신중함 또는 사려 깊음(prudence) 등의 뜻을 지니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성 훈련을 통해 '중용' ( Mesotes=영어 Golden Mean)을 지키는 것이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한다. 중용을 지키는 덕을 프로네시스라고 한다.

 

프로네시스의 보편적 목적은 행복에 있고 개별적 목적은 선한 행위에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기본적인 활동이 ‘안다’(이론적), ‘행한다’(실천적), ‘만든다’(기술적)로 이루어져 있다고 본다.

 

학문도 이 3가지에 따라 분류한다. 이중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행함’, 즉 실천적 학문인 정치학과 윤리학이다. 정치는 행함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고 행함은 선함 자체, 즉 윤리적 이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참된 정치 실현에 필요한 참된 정치적 리더십 요소로 윤리적 덕성(arete)과 프로네시스를 들고 있다. 프로네시스란 “진실을 포착하는 결정적인 마음의 습관(hexis)”이다. 또한 “선한 것을 목표로 적절하게 판단하고 행동하는 능력”이다.

 

필자가 이렇게 거창하게 아리스토텔레스의 프로네시스를 이야기하는 이유는 정치의 실천덕 지식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정치의 프로네시스는 사회적 실천과 사회적 역량을 함의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 존재의 최고의 좋은 삶[최선(最善)이라고 함. 최선(最善)=the best good)]에 관계하는 것이 프로네시스이다.  최고의 좋은 삶은 행복이다. 행복한 삶은 이성적 도야를 통한 덕과 윤리를 실천함에서 나올 수 있다.

 

정치인이 지향해야할 프로네시스는 무엇일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와 윤리의 밀접한 관계를 강조한다. 그 이유는 첫째, 정치인은 덕과 윤리를 갖추도록 스스로 많은 노력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둘째, 정치는 인간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행복한 삶은 덕과 윤리를 갖추었을 때만이 가능하다. 따라서 정치는 그 덕과 윤리를 갖출 수 있도록 훌륭한 법, 제도, 정책 등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므로 정치는 윤리적이어야 하며 그때 행복을 추구해 나갈 수 있다.

 

프로네시스의 덕을 갖춘 인간, 즉 윤리적인 인간만이 정치를 해야한다. 그런 사람이 좋은 정치가가 될 수 있다.

 

윤리와 정치는 세계라는 마차를 운영하는데 있어  린치 핀(linchpin)이며 초석(cornerstone)과도 같다. 린치핀은 자동차. 마차·수레의 바퀴가 빠지지 않도록 축에 꽂는 핀을 의미한다.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 윤리와 정치는 반드시 필요한 동반자적 관계라는 의미이다. 코너스톤은 건물. 집의 기둥을 받치는 역할을 하는 주춧돌이다. 기둥을 세우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주춧돌이다. 따라서 윤리와 정치는 동반자라는 의미이다.

 

우리는 정치를 위해 삶을 삶을 영위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가 인간을 위해 행위를 해야하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의 인간 삶에 대한 선(善)한 행위가 중요하다.

 

권력을 행사함에 있어 도덕적 근거를 바탕으로 이루어 져야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다. 도덕적 근거를 바탕으로 권력행사를 하는 것을 “정의에 따라 권력이 행사”된다고 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 선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고 평등하고 분배되는 것이다. 이것이 정의의 실현이다.

마키아벨리(Niccolò Machiavelli)의  [군주론]에서 “사랑의 대상과 공포의 대상”이 있을 때 어떤 것이 더 바람직 하나에 대해  이야기가 나온다. “양자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사랑받는 것보다 공포의 대상이 되는 것이 훨씬 안전하다.”하다고 한다.

 

정치는 사랑의 대상이어야 하지 공포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사랑의 대상이 선의 실현이 되는 것이다. 

 

/김정겸/한국외국어 대학교 철학과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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